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한 아랍 국가들의 무능함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해방은 자신들의 힘으로 달성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아라파트다.
아라파트는 1929년 8월 24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로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을 조직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집트군 장교로 입대하여 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으나 참혹한 패배를 경험하고 아랍 국가들의 무능함에 실망했다.
1959년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활동하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규합하여 무장 조직‘파타(Fatah)’를 창설했다. 파타는 아랍어로 ‘정복’ 또는 ‘승리’를 뜻한다. 아라파트와 파타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대표하며 팔레스타인 난민과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운영되었다.
1967년 6월, 아랍 국가들이 6일 전쟁에서 대패하고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한 것은 PLO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슈케이리 의장의 외교적 접근이 별다른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PLO는 실질적인 지지 기반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슈케이리 의장이 전쟁 중 팔레스타인인은 요르단으로 피신하라고 권고한 것은, 그의 지도력을 무너뜨렸고 PLO 존재의 의미를 흔들어 놓았다.
아라파트와 파타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안지구 탈환을 목표로 요르단 국경의 작은 마을 알카라메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스라엘군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확대해 갔다.
1968년 이스라엘군은 15,000명의 병력과 탱크, 전투기를 동원해 알카라메 파타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당시 파타의 무장 요원은 400명 규모로 이스라엘의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서안지구를 빼앗긴 공동의 원한을 가진 요르단군이 파타를 적극 지원하며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섰다. 아라파트는 이 전투에서 직접 총을 들고 이스라엘의 공격에 저항했다.
이스라엘군은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고 탱크와 무기를 버려둔 채 하루 만에 철수했다. 이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처음으로 아랍 세력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라파트는 파타 대원들과 함께 이스라엘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헬멧, 탄약통, 장갑차 부품 등을 마을 광장에 진열하고, 흑백 무늬의 쿠피야(두건)와 카키색 군복 차림으로 나타나 “우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다. 이 투쟁은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연설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그의 넘치는 열정과 카리스마에 감동했다.
국제 언론은 이를 전 세계로 전송했으며, 아라파트의 존재가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PLO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PLO 집행위원장 겸 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는 PLO가 그간의 외교 활동 위주 노선에서 벗어나, 무장 투쟁이라는 실질적인 저항의 노선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이 점령 중인 팔레스타인 땅을 피해 이스라엘군과 맞서 승리한 요르단의 알카라메에 PLO 본부를 구축하고 조직을 정비하여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해방을 위한 대이스라엘 투쟁을 본격화했다.
한편, 요르단은 공동의 적인 이스라엘에 맞서는 아라파트 의장과 PLO를 지원하기는 하나, 서안지구는 자신들의 영토로서 자신들이 회복해야 할 땅이라는 생각이 강한 터라, 국제사회가 PLO와 아라파트 의장을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