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다, 집 나가면
살 집을 구할 동안 시티에 있는 도미토리에서 묵었다. 여자 4인이 쓰는 도미토리였다. 처음 그 방에 들어선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어두운 방 안에 쌀쌀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잔 터라 짐도 풀지 않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서러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방 안에 혼자 누워서 호주행을 택한 것을 후회했다.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한국에서도 사기를 당한 내가 호주에서도 당할 것 같았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몇 시간 후, 스코틀랜드에서 온 여자 3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같은 방을 쓸 사람들이었다.
멜버른에 도착하고 한 번도 멜버른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집이 없는 건 생각이상으로 무섭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당장의 공포였다. 당장 내가 누워서 잘 곳이 없다는 것.
매일 빅토리아 도서관에 가서 집을 찾아봤다. 너무 막막해서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플랫메이트부터 한인셰어까지 다 찾아봤다. 내가 찾던 조건은 여자만 살고 시티에서 트램으로 20분 이하로 소요되는 곳이었다. 몇몇 괜찮아 보이는 곳들은 인스펙션도 했다. 처음 봤던 곳은 시티 중심에 위치해 있고 여자 4명이 사는 셰어였다. 처음 인스펙션은 나에게 충격을 줬다. 좁은 방에 4명이 다닥다닥 살고 있었다. 그때 처음 현실을 자각했다. 도시에서 괜찮은 집에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걸. 그 후 다른 셰어를 보러 트램을 20분 타고, 땡볕아래 20분을 걸어갔다. 그런데 공고에 올라온 것과 다르게 남자도 같이 산다는 것이다. 헛걸음을 하고 돌아왔다. 그날 호스텔에 들어가서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여자에게 집이 안 구해진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그 여자는 나에게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래도 그 친구들이 체크아웃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조용한 방에 혼자 넓은 방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건 생각만 해도 외롭고 끔찍했다. 사람들의 기척조차 그리웠다.
그다음 날은 40분을 트램을 타고 인스펙션을 갔다. 한인 셰어였다. 들어가자마자 큰 개가 달려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한국 사람이라 호스텔에서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를 했다. 주인은 자기가 어떻게 호주에 정착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동물을 무서워 하지만 여자만 사는 집을 구하는 건 정말 어렵고 남은 매물도 너무 없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원했지만 주인은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인은 바로 장사꾼으로 돌변해서 이 집에 4일 정도 묵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분명 호스텔 하루 숙박비를 말해줬는데 훨씬 더 비싼 값을 부르며 흥정했다. 싸함을 느낀 나는 서둘러 집에 가겠다고 나왔다. 역시 해외에서는 한국 사람을 더 조심하라는 말이 맞음을 느꼈다.
내일이면 호스텔 체크아웃인데 마음은 조급해져 가고 설상가상으로 호스텔이 뭄바 페스티벌로 만실이 되어 연장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 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이 없는데 내일 호스텔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 엄마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줬다.
숙소의 위치는 단데농(Dandenong). 시티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돈이 아까워서 단데농으로 향했다. 기차가 한없이 달렸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어느 곳에 내렸다. 이때부터 너무너무 무서웠다. 돈이 없어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호텔로 가려고 했지만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 외져서 도무지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나는 멈춰 섰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최대한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 같다. 택시를 잡기 위해 앱을 깔았다. 손이 부들거렸다. 그리고 빨리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가 무서워 보여서 또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 택시로는 5분 거리라서 빨리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정말 최악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모텔.. 엘리베이터도 없고 화장실도 최악. 오면서도 엄마를 향한 원망이 컸는데 도착하고 나니 분노가 폭발했다. 소요 시간 1시간+ 기차요금+ 호텔요금이 너무 아까웠다. 어떻게 돈을 아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돈을 날리지..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분노의 감정이 지나가고는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왔다. 내일 다시 돌아가는 길은 어떡하며, 당장 오늘 밤은 어떡할까. 정신을 차려야 빨리 움직이는데 사람이 정신을 못 차렸다. 계속 손이 떨리고 뭘 해야 될지 몰랐다. 이럴수록 더 침착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오늘 할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혼자 호주에 오고 위기가 올 때마다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불안감과 공포감이 드는 내 마음을 주체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감정이 주체 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몇 분을 엄마와 통화하면서 엉엉 울었다. 엄마에게 애꿎게 화내서 미안하고 내가 너무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누웠다. 눕자마자 하늘의 장난인 듯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
아침부터 바리바리 짐을 싸고 다시 시티로 향했다. 도크랜드(Docklands)에 있는 한인 셰어였는데 층고만 높아졌는데도 훨씬 괜찮아 보였다. 여자만 살고 시티까지 트램으로 10분이고 무엇보다 바로 앞이 항구였다. 당장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호락호락하게 그냥 계약을 해주지 않았다. 원래 제시했던 비용보다 더 높게 받으려고 했지만 나는 제안을 수락했다. 포기했기 때문이다.
원래 묵었던 호스텔로 돌아가 새로운 방을 배정받았다. 나보다 어린 독일 여자 그리고 7살 차이가 나는 중국 여자가 있었다. 독일 여자애도 워홀로 왔는데 나처럼 집을 구하지 않았다. 호스텔에 살면서 새벽부터 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물류 창고에서 일을 한다. 거처를 옮기며 일하고 사는 것에 전혀 불안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나와 반대의 모습이었다. 그 친구와 저녁도 먹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눈에서 성숙함이 느껴졌다. 강직했다.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라고 했다. 다양한 기회를 만들라고 했다. 때마침 식사하던 자리 옆에 프랑스에서 온 무리가 있었다. 그 무리와 우연히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국민대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친구가 있어서 친해지게 되었다. 이 무리들 역시 호스텔에 전전하며 파트타임을 하며 살고 있었다. 호스텔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재미를 마지막 날에 느껴서 아쉬웠다. 집에만 집중하지 말고 느슨하게 살았어도 좋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인간이 사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집에 정착해서 고정적인 직업을 가지는 게 내가 생각해 왔던 이상적이고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