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과주의 행정, 이제는 침묵의 리더십도 포함하라
“막아낸 성과도 보상받아야 한다.”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던진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헌신과 침묵 속에서 국가를 지켜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제는 공적으로 평가할 시점임을 선언한 말이다. 오늘도 재난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이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무명의 수고가 당연시되는 현실은, 우리 행정 철학이 여전히 결과 중심주의에 갇혀 있음을 방증한다.
공직사회는 수십 년간 ‘보여주는 성과’에 매달려 왔다. 숫자로 환산되는 보고서, 단기 프로젝트, 화려한 발표회가 ‘일 잘한다’는 증표처럼 여겨졌다. 위기를 비켜간 일상도, 누군가의 조용한 기여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조용히 실패를 막고, 위기를 피한 일상 속에 있다. 이 ‘조용한 성과’는 통계와 수치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본질적 기여다. 문제는, 그 공로를 가시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미비하다는 점이다.
노한동 전 문체부 공무원은 저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에서 “개인은 유능해도 조직은 무능해진다”라고 꼬집었다. 공직사회에 만연한 과도한 형식주의, 회의 반복, 무의미한 자료 생산은 구성원의 창의성을 억누르며 결국 국민의 불신을 부른다. 열 시간의 보고서 작성보다 10분간 시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일이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직은 잊고 있다. 혁신은 말이 아니라 구조에서 비롯되며, 성과주의가 공허해지는 지점은 그 구조가 사람을 보지 못할 때다.
그러나 대한민국 공직의 현실은 이들을 무시한다. 사고가 터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을 관리한 성과는 무시되기 일쑤다. 행정안전부 『정부 조직문화 진단 보고서 2024』에 따르면, 공직자의 58.3%가 “성과를 드러내지 않으면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지 않는다”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조직문화는 예측 가능한 실패를 방치하게 만들며, 결국 국민의 안전과 복지에 누수가 생긴다. 숫자에만 매몰된 행정은, 정작 국민의 삶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기관장 재신임 시 외부 공모 절차 없이 기관 내부 평가위원회만으로 연임을 결정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Y 공기업의 경우, 내부 평가만으로 ‘우수’ 등급을 부여하고 연임을 확정했지만, 세부 평가 기준과 절차는 비공개로 처리되었고, 이에 대한 구성원의 이의 제기나 설명 절차도 부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만 남고 과정은 감춰지는, ‘절차 없는 성과’ 구조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신뢰는 행동과 기준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때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기준을 믿으라고 강요받고 있다. 책임은 추궁되지만, 헌신은 입증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정의로운 평가는 가능하지 않다. 신뢰받는 공직은 투명한 기준과 눈에 보이는 실천 위에서만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공동체의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개인의 공을 넘어선다”라고 했다. 공무원이라면 그 선은 단기 성과보다 국민이 체감하는 ‘안정된 오늘’을 만드는 것이다. 예방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단지 행정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윤리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다. 더 나은 행정은 불필요한 실패를 줄이는 기술이자, 신뢰를 축적하는 인내의 반복이다.
포상도 마찬가지이다. 관리자보다 실무자에게도 보상이 가야 한다. 누군가는 밤낮없이 모니터링하고, 단 한 줄의 정책 문구를 다듬어 시민 불만을 사전에 막는다. 이름 없는 헌신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강한 기둥이다. 그러한 노력이 조직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면, 청렴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해진다. 이제는 공직자 개인의 양심에 기대기보다는, 구조적 보상과 사회적 존중이 병행되는 체계가 필요하다.
조직의 철학이 변해야 한다. 성과는 숫자가 아니라 의미, 실적은 수치가 아니라 과정이다. 공직 리더십은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된 책임과 ‘많은 사람의 하루를 지킨 기록’을 품어야 한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알프레드는 “세상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침묵의 리더십이야말로, 진짜 공직이 회복해야 할 신뢰의 본질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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