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백년종년
종연은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까무룩 조각잠을 자고 서둘러 유치원으로 출근했다.
어제 겪은 경로를 다시 밟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차…. 시댁에서 나와 두 걸음쯤 걷자마자 발 뒷 꿈치가 끔찍하게 아팠다.
종연은 평소 안 하던 욕지거리를 하며 골목 귀퉁이 편의점에서 반창고를 구입해 오른쪽에 3겹, 왼쪽에 2겹을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된 듯 비장하게 붙였다.
자 이제 무기 장착했으니 유치원으로 출발!!!!
무사히 출근한 종연은 전 날 기차에서 야무지게 완성한 수업 ppt를 이용해 흡족하게 수업을 마무리하고 원무실 소파에 온 힘을 실어 털썩 쓰러졌다.
종연은 핸드폰에서 손임의 연락이 없음을 확인한 뒤 원무실 문을 열고 종연 옆자리로 다이빙한 옆 반 지영쌤 팔짱을 꼈다. 연달아 상윤쌤, 효진쌤도 들어왔다.
회의 시간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종연과 동료 선생님들은 간단히 반 아이들의 귀여운 ‘오늘의 실수’와 각자의 ‘최애 급식 메뉴’ 등 일상적인 주제들을 놓고 아이스 브레이킹을 한 뒤 본격적인 수다를 시작했다. 오늘의 주제는 당연히 어제 시댁에서 첫제사를 지낸 종연의 이야기였다.
“제사를 지냈다고 하기엔 쑥스러워. 음식 준비는 어머님이랑 형님이 다 하셨는 걸 뭐. 평일이라 일찍 가서 내가 뭘 할 수가 있나… 죄송스러운 마음에 설거지 부엌 청소 등은 내가 손 걷어붙이고 다 해 부렀지 하하하.”
“그게 참 어쩔 수 없는 게 직장을 다니니 매번 행사 때 시댁만 가면 죄인이 된 기분이에요.”
종연보다 2년 일찍 결혼한 지영쌤은 한숨을 쉬며 연달아 말했다.
“그래도 종연쌤은 음식 안 해서 다행이에요. 우리는 1년에 제사만 10번이고 유치원 다니면서 10번에 8번은 제사상 음식 다 내 차지거든요. 그런데 부득이하게 1~2번 빠지면 난 나쁜 며느리 되는 거예요.”
상윤쌤이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지영쌤은 제삿날 다가오기 전 주부터 스트레스받고 당일날은 맨날 헐레벌떡 도망자 영화 찍었잖아요 하하하… 하….”
아직 미혼인 상윤쌤은 웃자고 한 소리에 심각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머쓱하게 손에 든 커피를 홀짝거렸다.
“얼마 안 남았어. 2주 후에 시할아버님 제사야. 정말 이해가 안 돼. 신랑과 함께 맞벌이하는데 우리 집도 아니고 며느리란 이유로 시댁 제사를 왜 매번 뼛속까지 내 일인 양 모셔야 하는지… 더 웃긴 거 말해줄까?”
지영쌤은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모두를 모아놓고 속삭였다.
“시댁 장남인 우리 신랑은 어르신들 제삿날 하나도 몰라요. 누구 제사인지도 말이에요.”
“헐!!!!” 쌤들의 나지막한 탄식소리!!
종연은 그제야 종연이 결혼 전에 시댁 제사나 행사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종연은 그저 결혼이 알콩달콩한 손임과의 연장된 연애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종연은 글로 배운 결혼생활에서 실전 편을 체험 중이다.
종연이 말했다.
“지영쌤은 시댁이 가까우니 시댁 가느라 고생하진 않겠다 생각했는데 음식 준비를 다 해야 하는구나. 난 어제 목동까지 가는데 진을 다 빼서 너무 힘들었어.
아침에 출근할 때 그 길을 다시 오는데 환장하겠더라고.
그런데 어쩌겠어. 며느리 도리 해야지.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종연도 갑자기 쌤들을 모아놓고 속삭였다.
“나 음식 준비 같이 못해서 며느리 도리도 못한 이상한 며느리 됐잖아.”
쌤들은 이제 해탈한 듯 박장대소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효진쌤이 부른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임신하면 제사 준비, 명절 차례 준비 안 할 것 같지? 준비 같이 안 해서 특별히 뭐라 하시진 않지만 쉬고 있는 며느리는 그림 자체가 잘못된 그림이야. 난 너무 불편해서 그냥 같이 준비해. 배가 좀 더 부르고 몸이 힘들어지면 그땐 어떻게 할까 벌써부터 걱정이네.”
“에이 그래도 임신했는데 오랫동안 서서 하는 일은 안 하셔도 될 거예요.”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지영쌤은 마치 본인이 배불러서 제사 음식을 하고 있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종연은 맞벌이 중 제사 음식 준비까지 야무지게 하며 며느리 도리를 하는 지영쌤과 임신 중 인데도 시댁 행사에서 자기 몸을 돌보기 보다 며느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제사 준비를 우선했다는 효진쌤의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회의시간이 다가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 선생님의 교실로 출발하면서 종연은 손임의 연락이 왔나 다시 한번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메시지 창에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손임은 오늘 저녁 도착한다.
종연은 먼저 전화해 볼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