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손님 백년종년
한편 손임은 영원 통신의 도쿄 지사에 근무 중인 장 차장과 점심 식사 후 독특한 인테리어의 일본식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손임은 전 날 종연이 손임과의 통화 말미에 꽤 지친 기색이었음을 기억하고 문득 종연이 제사 당일 유치원에서 오랜 시간 목동까지 가는 것이 고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형수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종연이 제사 후 뒷정리를 모두 하고 최선을 다해 시댁 제사를 섬겼는데 손임의 말로 종연은 분명히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놈의 며느리 도리… 손임은 할 수만 있다면 전날로 돌아가 종연과 다시 통화를 하고 싶었다.
종연은 오늘 아침 유치원에 잘 출근했을까?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업무 얘기를 하다가 장 차장이 물었다.
“남대리. 요새 신혼인데 출장 와서 제수씨 많이 보고 싶겠어.”
“아…. 보고 싶죠.”
손임은 뜸을 들이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남대리 무슨 일 있어? 허허 신혼이 마냥 행복한 꽃길은 아닌가 봐.”
“네.. 뭐.. 어제 본가 제사 문제로 아내랑 좀 다퉜네요.. 아직도 아내랑 싸우면 화해하고 해결하고 풀어나가는 게 어려워요.”
“우리도 벌써 결혼 7년 차네. 나도 신혼 때 수인이 엄마랑 입씨름 무지하게 했어.”
장 차장의 말에 손임은 어제저녁 종연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항상 제사 음식을 하고 명절 상 차리는 것을 당연하게 하셨으니까 내 아내도 어머니와 함께 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아내는 아내 집도 아닌 남편 집안 어른들 제사에 남편 없이 힘들게 가서 일했다는 식으로 말하니 솔직히 화가 나더라고요. 이제 결혼했으니 남편집이 자기 집 아닌가요?
“남대리. 나이도 많지 않은데 생각보다 노친네 마인드네. 하하.”
손임은 나름 신세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장 차장의 꼰대 드립에 깜짝 놀랐다.
장 차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하기야 나도 자네랑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아내랑 싸웠지.
수인이 엄마는 나랑 같이 맞벌이하는데 시댁 제사를 계속 혼자 도맡아 하니 힘들었던 거야.
난 또 외아들이고 누나도 2명이나 있잖아. 처음에는 그냥 묵묵히 해내서 아무 생각이 없다가 일본 지사 발령받기 전에 대판 난리가 났어. 이제 시댁에서 제사를 안 지내겠다는 거야. 아내가 예고 없이 선전 포고를 박아버리니 나도 놀라서 제정신이냐고, 그럼 누가 제사를 모시냐고 큰소리를 쳤지.”
손임은 장 차장의 말에 움직이지 않은 고정관념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그럼 제사는 누가 준비하나요? 거 참..”
“나도 펄쩍 뛰었지. 그랬더니 아내가 그러더라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자손들 있는데 왜 자기 빼면 제사 모실 사람이 없냐는 거야.
알고 보니 어머님은 장 만 봐 놓으시고 음식을 계속 아내 혼자 장만하다가 11월 제사 때 아내 회사 업무로 좀 늦게 갔더니 어머니랑 누나들이 계속 구박을 한 거지. 난 바빠서 늦게 가거나 아예 참석을 못해도 당연히 이해해 주시는데 며느리는 그게 안 되는 거야. 나중에 알았는데 수인이 엄마가 회사에서 업무를 많이 빼서 여간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더라고, ”
“아이고 형수님, 속상하셨겠네요. 그런데 같이 안 가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모르셨어요?”
장 차장은 후회가 가득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11월 그때 한창 바빴거든. 남대리도 결혼준비 한다고 바쁜 데다가 일본 직원이랑 글로벌 프로젝트 준비한다고 야근하고 출장 가고 정신없었어. 아내도 이해하고 군소리 없이 시댁 제사를 다 챙겼는데 어머니랑 누나들이 일도 안 하면서 며느리 운운하며 한번 늦었다고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는 둥, 집 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왔다는 둥 억지를 쓰니 터진 거지.”
“집 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왔다고요? 어머니랑 누나분들도 다 여성분이신데… 어떻게 그런 말은 하실 수가 있나요? 그래서 어떻게 결론 났어요?”
“보면 몰라? 나 지금 일본에 와 있잖아. 바로 일본 지사 발령 신청했지. 한국에 있으면서 제사를 안 지낼 수는 없고 수인이 엄마는 시댁에 안 간다고 하니 ‘일본 주재원으로 가자!’ 하고 우리 부부가 함께 결론지었지.”
손임은 이런 사유로도 주재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래서 갑자기 일본으로 오셨구나. 차장님 어머님이랑 누님들이 가만 계셨어요?”
“내가 맘을 단단히 먹고 말씀드렸지. 누나들도 시댁에서 안 지내는 제사 우리 와이프가 왜 구박받아가며 계속 준비하냐고 말이야. 조상님들 뵐 면 목 없으면 어머니랑 누나들이 제사, 명절 준비하라고.. 휴…”
“차장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난 결혼했고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가족은 아내와 수인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용기가 나더라고. 하하”
손임은 장 차장님의 용기에 감탄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수인이 엄마한테 당연한 듯 우리 집 일을 떠넘기고 모른 척 한 거더라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수인이 엄마한테 미안하고 면목없어.
남대리도 자네 없이 시댁 제사에 가서 고생한 아내한테 당연한 며느리의 일인 것처럼 자네 집 일을 떠넘기지 마. 자네 아내나 수인이 엄마나 남의 집 귀한 딸이야. 수인이 낳고 보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인데 나중에 결혼해서 남의 집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 제사상 차려줄 거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더라.”
손임은 순간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딸이 낯선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상상하고 몸서리쳤다.
“그래서 지금은 차장님네 제사 어떻게 지내요?”
장 차장은 세상 시원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