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백년종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종연의 배도 점점 불러왔다.
출근길.. 종연은 제법 부른 배를 안전하게 감싸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 시간대에 자주 뵈었던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계속 지켜봤는데… 임신한 거 맞죠? 몇 개월이에요?
종연은 아주머니의 호기심 어린 눈을 바라보며 상세하게 말씀드렸다.
“19주예요 5개월 정도 되었네요.”
“어머나 그런데 이렇게 배가 많이 나왔어요? 혹시 초산 아니에요?”
헐. 종연은 자기도 모르게 배를 내려다봤다. 입덧이 없었던 터라 5개월 동안 양껏, 맘껏 먹었던 종연이다.
“초산입니다만…”
“어머나.. 임신했다고 너무 이것저것 많이 먹으면 나중에 임신성 당뇨 와서 조심해야 돼요..
애 낳을 때도 얼마나 힘든데..”
종연은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오지랖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만 끔뻑거리다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아. 네.. 그렇죠.”
“우리 며느리도 임신 중인데 남일 같지가 않네. 뒤돌아봐요.”
종연은 얼떨결에 뒤돌아섰다.
“엉덩이가 펑퍼짐하니 아들이네 아들이야. 우리 며느리랑 엉덩이 모양이 똑같아요.”
종연은 ‘저 집 며느님도 참 피곤하시겠다’ 고 생각하며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다행히 종연이 탈 버스가 와서 (친절을 가장한) 무례함이 난무하는 이름 모를 아주머니와의 대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좀 걷더라도 다른 정류장으로 가야겠다.’
종연은 정체성이 확실한 임산부의 모습이기에 고맙게도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오늘은 퇴근 후 휴직 중인 효진쌤네 방문하기로 했다. 신생아 때랑 간간히 사진으로만 본 효진쌤 아들을 실물로 영접하다니.. 종연은 버스 정류장에서의 불쾌한 기억이 날아갈 만큼 들떴다.
효진쌤의 집은 실로 오랜만에 어른들의 목소리로 오디오가 꽉 찼다.
“세상에. 우리 원준이 옹알이 따라 하기만 할 줄 알았던 입이 오늘 거미줄 걷어내고 대화란 걸 해보네 이게 얼마만이야..”
효진쌤은 쌤들의 방문으로 묵혀뒀던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지영쌤이 깎아 놓은 사과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원준이 고새 너무 많이 컸어요. 크면서 형부랑 판박이처럼 똑같아지는 것 같아요.
종연도 신기한 듯 원준이가 좋아하는 딸랑이를 흔들면서 얘기했다.
“시댁에서 친탁했다고 좋아하겠어요. 우리 남편은 누가 봐도 외탁이라 시할머님이 잘 안아주지도 않았대요. 아주버님은 걸어 다니는데도 친탁했다고 계속 안아주고 업어주고…”
효진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아빠를 닮았든 엄마를 닮았든 내 뱃속에서 나온 우리 아들이라는 게 중요하지 머.”
상윤쌤은 연신 신기한 듯 원준이를 요리조리 바라봤다.
옆에서 보니 볼살 때문에 입이 안 보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연신 카메라로 찍어댔다.
“원준이 낳고 나니 어땠어요? 더 편해지긴 했어요? 7개월 접어드니 어떤 자세로 있어도 불편하고 힘들어서 미칠 거 같은데 하나같이 애기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을 때라고 말씀하시니 겁이 많이 나요.”
지영쌤이 궁금한 마음에 더 해 불만을 토로했다
“나도 임신기간 내내 들었던 말이야. 심지어 애를 낳아보지도 않은 아저씨한테도 들었어.
위로일까? 아는 척일까? 들을 때마다 액션 취하기가 애매하더라고.
뱃속에 있던 원준이를 낳고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지만 또 지루하기도 해. 매우 지루한 하드코어라고나 할까? 하하
그런데 뱃속에 있을 때는 초기에 입덧도 심하고 중, 후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허리 골반 갈비뼈 꼬리뼈까지 안 아픈 곳이 없으니 애가 뱃속에 있을 때 편하다는 말은 임산부로서 정말 듣기 괴로운 말이야.”
종연은 오늘 아침 만났던 아줌마를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임산부와 아기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씀하시는데 한 두 번이면 몰라도 반복적으로 듣고 대답하다 보면 자꾸 해명하는 로봇 같다니까요
커피 마시면 임산부가 왜 마시냐, 과자 먹으면 단거 왜 먹냐, 배가 많이 나오면 애기 커져서 힘들다, 바지가 너무 꽉 끼는 거 아니냐, 노산인데 큰일 났다…
이런 종류의 말을 배부른 임산부한테 걱정한답시고 말하는데 힘들 때는 그냥 귀를 씻고 싶더라고요.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필터를 귀에 달 수도 없고.. 참..
지영쌤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저도 출산 날이 가까워지고 배가 남산만 해지니까 자연분만 해야 한다, 모유수유 해야 한다… 어찌나 본인들의 의견을 어필하시는지 몰라요. 하하..
이제는 그냥 네. 네. 대답해요. 성별 물어보시는 건 기본이고 혼자는 외로우니 아기를 더 낳아야 한다는 둥 아들이니 딸도 있어야 한다는 둥.. 다들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려니 하지만 정말이지 슈퍼 파워 오지랖이라고요.”
오랜만에 쏟아내는 쌤들의 수다에 종연과 지영쌤은 임산부를 향한 참견에 대한 울분을 토함으로, 상윤쌤은 꼬물꼬물 세상 귀여운 원준이를 보면서, 효진쌤은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어른들과 함께함으로 각자의 힐링 포인트를 찾았다.
효진쌤은 이 공간에서 아이를 출산한 유일한 여성답게 위엄에 가득 차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