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백년종년
집으로 오는 길.. 종연은 뱃속 아가와 이야기하며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기다렸던 임신이기에 종연은 최선을 다해 아기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신은 생각만큼 축복의 시간은 아니었다.
심각한 입덧은 없었지만 계속적인 소화불량과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불면증은 임신의 기쁨을 상쇄시켰고 체형의 변화는 여자로서 자신감을 떨어트렸으며 조금이라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임신했으니 마냥 행복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렸다.
시어머님은 종종 말씀하셨다.
“누구나 하는 임신 너무 유난 떠는 거 보기 안 좋아. 다 아기 가지고 낳고 하면서 잘 산단다.
나도 애 세명이나 쑥쑥 낳고 건강하게 잘 지내잖니.”
구구 절절 틀린 말씀 하나 없이 지당하신 말씀이시나 지금 상황의 종연에게는 공감이 전혀 되지 않았다.
멀리서 손임이 뛰어온다.
종연은 생명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느끼며 손임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은 드디어 아기 용품을 살 때 당당하게 성별을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다.
4주 만에 병원에 간 날 종연과 손임은 눈이 닿는 곳에 분홍빛과 하늘빛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찾아온 생명의 성별을 점치기에 바빴다.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하고 기대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가?
종연과 손임은 달고 맛있는 궁금함에 푹 빠진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기의 크기와 몸무게 등을 말씀해 주시면서 종연의 4주간 컨디션을 체크하셨다.
종연은 제법 사람의 형체를 보이는 아기가 너무 신기했다.
코는 오뚝하고 오밀조밀한 종연을 닮았고 이마는 손임처럼 툭 튀어나온 짱구상이었다.
하지만 어떤 각도로 봐도 아기는 자신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종연과 손임은 성별 파악을 포기하고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의사 선생님은 모든 진료 말미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고 진료를 마치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종연과 손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머리는 더 잽싸게 굴러갔다.
딸이다!!!!
손임은 임신 기간 내내 딸을 원했기에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허공에 치면서 외쳤다.
“앗싸라비아~~.”
후에 종연이 손임의 초딩스런 유치한 감탄사에 창피했던 나머지 핀잔을 줬을 때 비장하게 말했다.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거야. 날개가 있었으면 난 날아갔어.”
그러나 종연은 아들을 그토록 확신했던 어머님이 떠올라서 그런지,
진료 중 맘 졸였다가 성별을 듣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마냥 기쁘기보다는 맘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했다.
어머님께선 종연의 소식을 듣고 3초가량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종연은 침묵하시는 어머님으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문제의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머님… 딸이어서 죄송합니다.”
몇 초가 더 흐른 뒤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했다.”
전화를 끊고 종연은 뱃속 딸에게 미안한 마음과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성별의 문제로 어머님께 사과를 한 자신이 너무 못나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머님도, 종연도, 뱃속의 아기도 다 누군가의 딸인데 왜 그 존재 차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정당해야 하는지 종연은 원망의 대상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계속 울었다.
종연은 연신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너로 인해 행복하다고 속삭인 뒤 뱃속 아기의 이름을 ‘행복’이로 정했다.
다음날 어머님께서 찾아오셨다.
“내가 24시간을 꼬박 앓아누웠어. 손임이 딸 애지중지 키워서 남의 집에 준다 생각하니 너무 속상하더라고.. 하루 꼬박 아프면서 우리 손녀 잘 먹이고 학교 공부 다 시키고 좋은 곳에 시집까지 보내 놓고 나니 이제 개운하다. 이젠 손녀가 너무 이쁘네. 하하하.”
종연은 어머님의 말씀에서 킬링 포인트가 도대체 몇 개인가 세어보았다.
- 24시간을 앓으신 것?
-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딸을 남의 집에 준다고?
- 어머님께서 우리 딸을 잘 먹이고 학교 공부를 시킨다고?
- 뭐가 개운하지?
- 좋은 곳에 시집을?
- 이제야 손녀가 이쁘다고?
태어나지도 않은 종연과 손임의 딸은 그렇게 어머님의 망상 속에서 남의 집에 시집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