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백년종년
행복이가 치타공에 있는 국제 학교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 종연네 가족은 학교 여름 방학에 맞춰 한국으로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세명의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하나하나 챙겨야 할 사항이 많았다.
종연은 취향과 식성, 성별까지 다른 세 아이들을 돌보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손임은 대외적으로 보이는 아빠의 역할은 잘 해냈지만 이이들의 세세힌 케어는 모두 종연에게 의지했다.
손임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내내 3개의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티켓팅을 했으며 가족들을 위해 밥을 먹을 공간을 물색하는 등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동안 종연은 세 아이들을 온전히 케어했다.
대기하는 시간과 비행시간까지 도합 16시간 남짓 흐르고 종연네 가족은 시댁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모든 관계들이 얽히고설키며 인사를 나눈 후 종연은 서둘러 막내 젖을 먹였다.
쓰러질 것 같은 피로감이 엄습했지만 종연은 그럴 시간이 없다.
바로 사용할 짐을 풀어놔야 종연네 가족이 필요한 물건을 찾느라 엄마와 아내를 불러대지 않으니 말이다.
“자기야. 사랑이 쭈쭈 다 먹었어. 이제 짐 정리하자.”
종연이 사랑이를 내려놓고 손임을 부르며 거실로 나가려는 찰나 어머님의 부산스러운 버선발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듯 인상을 썼다.
흠칫 놀라 어머님을 바라본 순간 종연은 너무나도 잘 까먹는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만에 시댁에 온 종연은 손임이 자기 집에만 오면 모든 세상 근심 벗어 버리고 애정템 소파에 누워 쉬다가 잠이 든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아이고 얘!! 손임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얼마나 긴장이 풀리고 편하겠냐.
집에 와서라도 편하게 쉬게 해 줘야지. 애가 세명이나 되니 힘들게다.
고단한 애 깨우지 마라.”
행여나 아들 깰까 봐 소곤거리며 말하는 어머님이 종연은 그저 단세포 아메바 같았다.
시댁은 그저 단세포 집단이다. 마음을 더 넓게 쓸 생각이 없다.
정상적인 다세포 동물처럼 마음을 써 버리면 손임은 아내가 힘들든지 말든지 피로를 바로 풀 수 없고 어머님은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짐 정리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
손임은 아내보다 본인이 우선이고 어머님은 며느리의 고단함보다 아들의 피곤함이 신경 쓰인다.
포용력을 까치발만큼이라도 들면 담 넘어 배려하고 알아줘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일 텐데 그렇게 하면 동시에 본인들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반납해야 한다.
제일 편한 건 눈 질끈 감고 객 식구에게 다 떠 넘기는 것이다.
종연은 또 부당함을 삼키고 홀로 아이들을 돌보며 짐 정리를 했다.
누구보다 쉼이 필요했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던 종연은 해결되지 않은 지금의 감정을 늘 저장해 놓았던 마음속 어두운 공간에 넣어 놨다.
종연은 이전에 덮어 놨던 부정적 감정들이 시간차 순으로 썩어가고 부패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묵은 문제들과 해결되지 않은 분노들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세 아이의 엄마와 시댁에 있는 며느리는 시간이 없다.
당장 종연의 코 앞에 닥친 현실의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언제나 자신은 뒷전이다.
오늘도 종연은 ‘나중에..’라고 돼 뇌이며 마음속 창고의 문을 닫았다.
“종연아 이제 애들도 3명이고 너랑 남서방도 보험을 들어놔야 해..”
한국에 들어왔단 소식을 접한 종연의 고모는 끈질기게 종연에게 보험 얘기를 했다.
마침 손임과 종연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소중한 가족을 위해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알았어 고모~ 남서방이랑 의논해 볼게.”
손임은 종연 고모가 보내온 여러 가지 보험들과 딸려온 특약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손임은 아이들 상해보험과 실손 보험, 종연의 암보험, 손임의 종합보험을 최종적으로 검토한 후 말했다.
“우리 작은 이모도 이 쪽 일 하시니까 한번 비교해 볼게.
지인이라고 이것저것 안 따지고 보험 드는 것보다는 객관적으로 알아볼 건 알아봐야지.”
종연은 고모의 보험 플랜을 단순히 지인 찬스라 생각하는 듯 한 손임의 발언에 맘이 상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손임의 의견에 동의했다.
“알았어요. 그럼 알아보고 의논해요.
그런데 고모도 신경 써서 짜준 보험 플랜이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돼요.”
손임은 즉시 대답했다.
“그럼, 그럼. 다른 보험사도 알아보고 특약이랑 보험료 등을 비교만 해 보자고.”
하지만 다음날 손임의 이모가 시댁에 왔고 어머님과 이모님은 신이 나서 아이들과 종연 부부의 보험 가입을 독촉했다.
종연은 표정 관리가 도저히 안 돼서 ‘생각해 보겠다’ 말씀드리고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그네를 타며 이모님이 가실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집에 들어온 종연은 ‘어디 다녀왔냐’며 다그치는 어머님은 본체 만 체하고 손임에게 따졌다.
“갑자기 이모님한테 보험을 들겠다니 이게 무슨 경우예요?”
손임은 평소에 화를 낼 때도 보지 못했던 종연의 서슬 퍼런 낯빛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아이, 이모한테 물어봤더니 이모네 쪽 보험료도 싸고 기간도 길더라고… 그리고…”
종연은 단박에 손임의 말을 끊어내고 입으로 로켓포를 발사했다.
“보험료 알아보고 이것저것 따져보는 거 다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모님이 계약하러 오셨잖아요.
나는 그림자 와이프예요?
나랑 상의도 없이 이러면 당신과 당신 집안이 날 뭘로 보는지 뻔하잖아요?
아무리 혈연으로 묶여 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따지고 살펴보라고 나한테 얘기한 게 당신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모님이랑 지인으로 묶여서 홀라당 보험 계약을 하라고요?
손임은 안절부절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도 이렇게 오실 줄 몰랐지. 난 단지 어제 여러 가지 물어본 것뿐이라고..”
종연은 손임의 책임 회피성 대답에 이가 갈렸다.
“그래서 이모님이랑 어머님께서 다짜고짜 계약하자고 했을 때 실실거리면서 알았다고 했어요?”
손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방 밖에서 듣고 계신 어머님께서 대뜸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말씀하셨다.
“손임이 이모가 실적이 얼마나 좋은지 아니?
너희 고모가 실력이 달려서 보험 안 들겠다는데 왜 애를 잡고 난리야.
우리 방까지 네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게 들린다.
시댁에서 이게 무슨 경우니?
아버님께서 오죽하면 여기 와서 손임이 좀 구해주라고 하겠니.”
종연은 어머님의 근본 없는 워딩에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손임만 노려봤다.
손임은 가족이 개입된 일에는 종연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머님을 허겁지겁 모시고 나갔다.
종연은 오랫동안 밖에 나가서 젖을 물리지 못했던 막내에게 조용히 젖을 물리며 손임을 기다렸다.
다음날.. 종연과 손임은 보험 계약을 위해 종연 고모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