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결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그 트라우마는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갔던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다. 그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섬뜩하다...
트라우마의 전말은 이렇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등굣길에 있었던 일이다. 화가 잔뜩 난 말벌 10 마리가 나의 정수리와 손을 사정없이 쏘아대는 바람에 거의 정신적으로 쇼크 상태가 된 것이다. 내가 그 녀석들을 떼어내려 할수록 이들의 공격성은 더해갔다. 결국 나는 울면서 교통안전지킴이 할아버지에게 이놈들 떼어달라고 부탁한 끝에 죽음의 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후부터다. 그 당시 상처가 군데군데 크게 나버리는 바람에 학교 보건실에서는 응급처치가 불가능했다. 어쩌지 하고 있는 찰나에 방송으로 말벌에 쏘인 아이들은 보건실로 오라 해서 그 길로 근처 소아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 후 하굣길은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 소방관들이 그 말벌집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벌레 공포증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공포증의 대상이 말벌에게만 있었다. 사고 당일 나는 내일 등굣길을 걱정해야만 했다. 말벌을 다시 마주칠까 봐 공포도 밀려왔다.... 그렇게 수년이 지났다. 말벌은 5년 뒤인 중2 때 다시 마주했다. 불현듯 그날의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야외에서 미술 수업 중이었는데 갑자기 덩치만 한 말벌이 내 주위를 재빠르게 맴도는 것이다.
순간 나는 사지육신이 퍼렇게 질렸고 비명을 지르며 온 사방팔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공포증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 말벌이 나를 쏘면 어떡하지에 대한 불안이 나의 인식체계에 깔렸다. 그러나 그 공포를 모르는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은 그 말벌 갖고 호들갑 떤다는 식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절대로 모른다!!! 말벌에 대한 공포증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말벌에 쏘여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다시는 그 녀석과 상중하기도 싫다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아... 또 쏘이면 어떡하지?"
그런 일을 고3 때도 겪었지. 수능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오후에 자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위만 한 말벌이 교실에 들어왔다. 그 녀석은 당황해서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고 나는 그때처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호기로운 한 급우의 등장으로 그 말벌은 황천길의 이슬로 사라졌다. 말벌 잡는 방식이 기괴했긴 했지만 나는 한동안 급우들로부터 말벌을 무서워하는 아이라고 조롱을 받았다.
학창 시절이 끝난 지금도 나는 캠핑을 가거나 산행을 할 때 말벌에 대한 불안을 갖는 다. 아니, 이제는 나비나, 파리, 모기, 바퀴벌레, 박각시, 나방 등 다른 해충이나 곤충들에게서도 공포를 느낀다. 이들이 나타나면 비명부터 질러대서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힘들어한다.
나는 안다. 특정 공포증이 엄연한 이상심리이며, 나뿐만 아니라 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또, 그것을 상상하느라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런 공포증을 그 자체로 사랑해야만 했다...
공포증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좋을까? 말벌이 창문에 들어오거나 말벌 시체만 보아도 하얗게 질러버리고 비명을 지르는 나였지만, 오히려 말벌을 보아도 가만히 있다거나, 그 상황을 즐기면 될까? 하지만 나는 이에 공감할 수 없다. 사람은 귀여운 것에 반응하고, 혐오스러워하는 것을 피해 간다. 그 논리대로라면 평생 말벌을 보지 않으면 될까?
그런 질문은 수 없이 많이 했다. 이제는 나의 심신이 그것을 생각하느라 많이 지친 상태다... 며칠 전에 형이 나에게 말벌 공포증을 치료하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그 방법은 벌레 수 만 마리를 빈 공실에 풀어놓은 상태에서 나는 방충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그 벌레 속에서 몇 시간 있는 것이 다라고 했다. 이렇게 한다면 벌레들이 고양이처럼 귀여워 지기라도 할까? (물론 바퀴벌레는 영원히 그럴 수 없다.)
나의 말벌 공포증은 내가 죽기 전까지 꼭 치료를 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과거이다. 오늘도 나는 말벌을 피하려 이리저리 피해 가고 있지만, 언젠간 극복하고 싶다.
부디 그러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