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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소도시 여행기] #5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

by 홍머루

'오랜만에 운전하고 싶다...'


때론 엉뚱한 생각이 과감한 결정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날이 그랬다. 일은 손에 안 잡히고 곧 주말이 다가와 설레기 시작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목요일 오후, 대뜸 구글 지도를 켜 주말에 나들이 갈 곳을 찾아본다.


운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집에서 너무 멀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가깝지 않은 곳. 바다를 보는 걸 좋아하는 짝꿍이 맘에 들어할 만한 곳. 그리고 우리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곳. 이 까다로운 조건들은 어느 한 장소로 우리 둘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날 퇴근 후, 우리는 버지니아주의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 VA)로 향했다.


버지니아 비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버지니아주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특히 여름엔 해수욕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하고, 피서객들이 몰리다 보니 숙소 값도 천정부지로 오르는 곳이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가 버지니아 비치에 간 날은 아직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집집마다 걸려있었던 1월 초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버지니아 비치까지는 4시간 정도가 걸린다. 거리는 대략 360km,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에 조금 못 미친다. / 출처: Google 지도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도심은 역시나 퇴근길 차들로 막힌다. 하지만 워싱턴 DC 지역을 벗어나니 우리의 차는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달린다. 특히 성수기가 아니다 보니, 버지니아 비치로 향하는 차들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것 같았다.


버지니아 비치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8시가 되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는 서둘러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방문한 식당은 Tulu Seaside Bar & Grill였는데, 주로 미국 퓨전 요리들을 파는 곳이었다. 후기가 좋아 골랐는데, 식당에 들어가 보니 꽤 고급스럽다. 식당 밖에는 버지니아 비치의 바닷가가 보여, 바다와 함께 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너무 늦어 창문 밖은 어두웠다.


1) Tulu Seaside Bar & Grill에선 스테이크, 햄버거를 비롯한 다양한 메뉴를 고를 수 있다. 2) 우리가 주문한 햄버거와 피시앤칩스.


대강 메뉴를 훑어보고는, 짝꿍은 피시앤칩스를, 나는 햄버거를 주문했다. 피시앤칩스는 우리가 생각했던 영국식 피시앤칩스가 아니어서 당황했지만, 담백한 대구 살코기와 같이 나온 토마토, 고구마, 적양파의 궁합이 어우러져서 훌륭했다. 햄버거는 예상했던 그대로 육즙 가득한 수제버거의 맛이었다. 식사를 마무리하니 오랜 운전으로 인한 피로가 몰려온다. 첫날은 그렇게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커튼 틈 사이로 비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떠졌다. 옆에서 누워있던 짝꿍도 일어났는지 유튜브 동영상 소리가 들린다. 뭔가에 홀린 듯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걷으니,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참 아름답다. 창문을 여니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꽤 선명하게 들린다. 짭조름한 바닷냄새가 살짝 나는 것도 같다. 우리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 떠오르는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한동안 감상했다.


KakaoTalk_20230427_202902820_02.jpg 버지니아 비치 바닷가에서의 아침. 날씨가 맑아 붉은 노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에, 짝꿍과 나는 버지니아 비치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데크길을 산책하기로 했다. 추운 겨울 아침이어서였는지 산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세서, 체감온도는 더욱 낮은 것 같았다. 한껏 움츠려진 몸을 이끌고,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산책로를 계속해서 걸었다. 쉬고 있는 갈매기들만 드문드문 있었던 버지니아 비치의 해변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사람 가득한 여름의 이곳은 어떤 분위기일까 상상하며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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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었지만 뭔가 쓸쓸해 보였던 한 겨울날 버지니아 비치 해변의 모습. 터보의 <회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소에서 체크아웃한 후,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인 케이프 헨리 등대(Cape Henry Lighthouse)로 향했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오래됐다는 케이프 헨리 등대는 무려 1792년에 완공되어서 수십 년간 어두운 바다를 비추었다고 한다. 지금은 등대의 역할을 하진 않지만, 높은 곳에서 버지니아 비치의 바닷가를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종종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니, 웬 군부대 입구가 나온다. 당황한 우리에게 경비병이 다가와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케이프 헨리 등대는 군부대 안에 있어, 등대를 구경하려면 신분증을 보여주고 따로 준비된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한단다.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군부대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셔틀버스를 타고 10분쯤 갔을까, 케이프 헨리 등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눈앞엔 2개의 등대가 있었는데, 갈색 벽돌로 지어진 등대가 관광목적으로 개방된 원래의 케이프 헨리 등대이고, 검은색/흰색으로 칠해진 등대는 현재도 등대로써 임무를 수행하는 새로 지어진 등대라고 한다. 새로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이 등대도 무려 1881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등대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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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네번째로 오래된 케이프 헨리 등대. 원형 계단을 오르면 탁 트인 버지니아 비치 바닷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사진 출처: 버지니아 비치 관광청 웹사이트
KakaoTalk_20230427_202902820_05.jpg (구) 케이프 헨리 등대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앞에 보이는 (신) 케이프 헨리 등대는 현재도 어두운 바다의 등불 역할을 하고 있다.


가파른 원형 계단을 오르니 숨이 차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계단의 폭도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로 좁아, 내려오는 관광객을 마주칠 땐 곤란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올라온 등대의 꼭대기에선 탁 트인 버지니아 비치 바닷가의 전경이 우릴 반겨주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등대의 검은색/흰색칠이 푸른 하늘과 바다와 대비돼 유난히 눈에 띈다. 우뚝 솟아있는 그 모습이 늠름하게까지 느껴진다. 다른 관광객들도 이 모습에 감탄했는지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우리는 등대에서 내려와, 아름답지만 고요하고 왠지 모르게 쓸쓸한 겨울 바다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던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 여행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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