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
달리기 위해 야밤을 택했다. 고속도로가 헐렁하다는 9시 뉴스는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뉴스는 정확했고 명절 고속도로 컨디션으로는 최상급이었다. 명절마다 도로에서 가다 서다 하는 일은 여간 힘든 노동이 아니다. 종일 앞치마 두르고 살 것은 잠시 잊었다. 일찍 내려가면 가사 노동 시간이 더 늘 것은 확실한데 도로에서 달릴 수만 있다면 감수할 생각이었다.
곧 보름달이 되고 싶은 달이 떠 있었다. 다 채워져 둥글어진다고 해도 500원짜리 동전 크기로 자랄 것 같은 달이 차창 밖에서 제법 훤하다. 월곶의 야경도 화려했다. 도심을 벗어난 우리는 질주했다. 명절마다 정체 구간이던 서해대교나 행담도 근처도 소통 원활이다. 쉬지 않고 달렸다. 뻥 뚫린 도로가 다소 어색했다. 첫 쉼을 서산 휴게소에서 했다. 밤공기가 제법 시원했고 야식을 챙겨 먹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 또한 궁금했다. 평소보다 삼사십 분 더 걸린 것은 명절 연휴 기간의 드문 경험이었고 명절 귀성길의 쾌거다. 시댁의 향기가 느껴지기 전까지만 그랬다.
새벽 두 시가 지난 시간에 비몽사몽 도착했다. 강아지 까미가 먼저 알고 짖어대자 어느 아들을 기다리셨는지 현관문이 열렸다.
“누구냐? 너희구나? 일찍 오니 좋구나. 하하”
보따리를 대충 정리하고 누웠다. 나를 따라온 달이 창가를 서성댔다. 이른 며느리의 등장에 몹시 기뻐하신 시어머니는 그 시간 이후로 부엌일은 말씀으로 다 하셨다. 명령어가 발사됐다.
“야야, 갈비는 맛있는데 소고기가 맛이 없는지 국이 맛이 없다? 오후에는 송편 만들 거라. 매운탕은 어떻게 끓여야 하고….”
아들들이 있어서인지 말에 힘이 넘쳤다. 앞치마에 물 마를 시간이 없었다. 코로나 전성시대에 생긴 신조어 돌밥 돌밥을 또 경험했다. 그래도 여럿이 먹는 밥상은 맛이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체중도 조금 늘었을 것이다.
“언제 갈 거야? 오늘 오후보다는 내일 새벽이 낫겠지?”
시어머님은 몇 시간 이래도 더 아들 며느리를 붙잡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뿌리칠 용기가 있었고 어머니의 아들도 쫓아온다고 했다. 어머님은 서운해하셨지만 어쩔 수 없다. 역시 치사랑은 힘들다. 언제 올라올까를 그렇게 저울질하던 중, 병중인 시동생의 소천 소식이 전해졌다. 추석 명절 오전이었다. 결혼도 못 하기도 했고 병이 길어서였는지 형제들은 조용한 장례를 진행하기로 했다.
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보름달이 은 동전처럼 떠 있었다. 떠나는 이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굴만 남기고 염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인이 웃고 있어 그나마 맘이 놓였다. 이승을 떠나는 의식은 떨리고 슬프고 무섭고 경건했다. 잘 떠나라고 밀어주라는데 잠시 무서움에 주춤했다. 먼저 간 사람이 어른이라는 장례지도사의 말에는 엄중한 무게가 실렸다. 안치실로 들어갈 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죽은 자가 홀로 불로 뛰어드는 순간에도 산자는 맛있는 것도 마시고 웃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너와 나의 경계는 또렷했고 시간은 따로 흘렀다.
따뜻한 고인을 품고 사찰로 향했다. 대웅전 뒤뜰에 풍장을 마치고 스님의 염불 의식이 시작됐다. 얼마나 정성 가득하신지 이미 고인이 극락에 도착했겠다 싶었다.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어머니는 염하는 곳에서 아들과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화장터나 절은 가지 않았다. 왜 그러시지, 했는데 그게 맞았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노인에게 화장터는 갈 곳이 못 되었다.
노인이 되어야 노인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밤, 아들을 떠나보낸 한 어머니가 잠 못 들고 슬퍼하겠다. 더 머물며 위로 해드려야 했지만, 명절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다. 그래도 평일 도로는 제법 여유로워 씽씽 달릴 수 있었다. 고인도 고속 질주해 새집에 빨리 이르길 바란다. 당신의 어제와 오늘은 극명하게 바뀌었고 같은 보름달 아래에서 서로 다른 길로 서로 다른 집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