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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자 Oct 15. 2024

아엠 어 티시

석류밭에서 살아남다.

세상의 많은 직업 중에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도  여전히 친절하고 상냥하게 상대방을 응대해야만 하는 직업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노동자라고 일컫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다.


그런데 투어컨덕터인 나도 서비스업인지라 가끔은 누가 만들어놨는지 모르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무조건적인 단어를 강요당하며 감정노동자들의 비애를 느끼곤 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캐리어를 끌고 세계공항을 누비며 외국을 주무대로 생활하는 투어컨덕터(TC)를 그저 화려한 직업으로만 보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 그분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을 듣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10월의 튀르키예는 석류수확기로 접어든다.


따라서 곳곳마다 잘 익은 석류나무밭들이 펼쳐지고 어디를 가든 갓 짜낸 석류주스를 맛보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물론 한국관광객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석류가 여자에게 좋다고 알려져서인지 관광 내내 석류주스를 사 먹는 데는 돈을 아끼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만난 모녀는 예외였다.


모녀팀이라 함은 언제나 다른 관광객들에게 부러움을 살정도로 다정한 커플 중 하나인데 이번 모녀팀은 1년 중 가장 맛있는 석류주스 한잔을 사 먹지 않았다.


심지어 버스에서조차 어머님은 딸과 떨어져 내 바로 뒷자리에 항상 혼자 앉으셨다.


아무튼 사진 한 장 같이 찍지 않고 대화조차 없는 모녀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터키의 유명휴양지 안탈리아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 야외뷔페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모녀손님은 식사장소로 내려오지 않아 객실로 찾아가 보니 어머님은 나를 보시자마자 무척이나 격앙된 목소리로 "내일 당장 한국으로 가게 해줘요. 더는 이 딸이랑 여행 못하겠어요" 라며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달라 하셨다. 내가 이해할만한 이유는 없었고 그저 딸이랑은 더 이상 여행을 못하겠다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살 수 있는 국내 기차표가 아니다.


게다가 가장여행하기 좋은 가을성수기였기에 한국으로 가는 국제선이 있다 해도 안탈리아에서 수도 이스탄불로 가는 국내선비행기표를 구하기는 더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아무리 고객이 우선인 서비스업이지만 딸과 여행하기가 싫어졌다는 단순한 이유로 내일 당장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제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한국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고객이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겠다는 어머님의 으름장에 어찌어찌 비행기표는 구해졌다.


사실 패키지여행 중 고객님들께서 부모의 상을 당한다던 지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든지 등의 이유로 귀국을 해야 할 경우 여행사는 적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를 구해드린다.


그러나 사실 머리로 이해가 안 되지만 이처럼 단순한 변심을 이유로 귀국요청을 하셔도 그것 또한 여행사는 외면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결국 다음날 이른 아침 가이드분과 나머지 28명의 손님들은 다음목적지 파묵칼레로 떠나셨고 나는 모녀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튀르키예의 수도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안탈리아 국내선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요청했다.


그런데 공항으로 출발직전 한국의 본사 담당자는 나에게 황당한 요구를 해왔다.


그것은 모녀손님두분의 국내선수속을 해드린 후 이미 다른 고객들이 향하고 있는 파묵칼레까지 혼자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손님들과 가이드님도 아침 일찍 출발하신 상태였고, 파묵칼레로 가는 다른 팀들과 합류해서 가라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무렵 혼자 여행하던 일본인 여자관광객의 피습사건으로 연일 티르키에 매스컴이 떠들썩한 상태였고, 현지에서 거주하시는 한국인 가이드분들 조차도 이용하기 꺼리는 이슬람국가 지방행 버스를 타고 그것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라는 요청이었기에 나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냐고 되물었으나 담당자에게 돌아온 말은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인솔자이니 무조건  가셔야죠"였다.


그 냉정한 말투는 마치 인솔자의 안전은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결국은 이 모든 상황을 제공하신 모녀고객의 국내선 수속을 도와드린 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들어가 버리는 두 분을 뒤로한 채 결국은 "경력이 몇 년인데 무서워하냐", "서비스정신이 부족하다", "나라면 주저 없이 가겠다" 등등 나보다 한참 어린 담당자 훈계를 들으며 오기 반 걱정 반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험난한길을 시작하고 말았다.


안탈리아 국내선에서 나온 나는 23kg의 무거운 케리어를 끌고 일단 택시를 탔다.


내가 아는 단어는 터키어로 고속터미널이라는 "오토가르" 뿐이었다.


흘깃흘깃 쳐다보는 택시기사가 혹시 나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면 어쩌지라는 첫 번째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우선 매표소로 향했다.


최종목적지 파묵칼레를 외치자 돌아오는 대답은 "데니즐리"였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에게 또다시 "파묵칼레 플리즈"를 외치자 직원은 메모지에 데니즐리에 도착해 작은 봉고차로 갈아타서 파묵칼레로 가야 한다는 설명을 그림으로 그려줬다.


그림실력이 있는 매표소 직원 덕분에 무사히 버스티켓을 구입하고 데니즐리행 고속버스에 탑승하자 동양인여자 이방인은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책임감이라는 거창한 이유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친하게 지내는 터키의 가이드들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며 걱정하는 문자를 계속해서 보내왔다.


그렇게 6시간을 달려 데니즐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먹은 건 오로지 샌드위치와 생수 한 병뿐이었다.



내가 도착한 데니즐리 시외버스터미널은 버스 한두 대가 정차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규모의 터미널로 오래되어 보이는 형광등이 줄로 연결되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큰 케리어를 끌며 헤매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파묵칼레?"라고 물었다. 순간 매표소 직원이 그려줬던 그림에 봉고차를 타야 한다는 게 떠올랐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내가 못 알아듣자 종이에 숫자를 적었다.


그 숫자는 파묵칼레로 가는 봉고차 차비였고 그는 차표를 파는 직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비용을 지불하는 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 두었던 나의 트렁크를 끌고 뛰어갔다.


놀란 나는 그를 쫓아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help me"를 외쳤고 밀려오는 공포에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현지인들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동양인 이방인여자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도망치던 그가 소리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파묵칼레로 가는 봉고차 기사였던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으나 그래도 내짐이 무사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안전하게 실어진 트렁크를 확인하고 탑승한 봉고차에는 손님이라고는 오로지 나 하나였다.


조명하나 환하게 켜지지 않은 생전 처음 와보는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짐을 훔쳐간 줄 알았던 사람을 믿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파묵칼레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TV에서나 봤던 알카에다 대원들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승객이 탑승했고 불빛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또다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봉고차에 탑승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어느새 봉고차에는 남자승객들로만 가득 찼고 모두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봉고차의 작은 공간 안에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두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불행하게도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두 시간이 흘러  기사는 내가 묶을 파묵칼레 호텔 앞에 나를 내려줬고 호텔 앞에 마중 나와있던 현지가이드를 만나지 마자 두려움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8분의 손님들 중 몇 분은 밤 12시가 넘어 도착한 나를 가족처럼 맞아주셨고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나에게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나 서비스정신을 운운하던  한국의 담당자는 도착했다는 나의 문자에 고생했다는 말은커녕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일을 말하지 말라는 괘변을 늘어놨다. 한국으로 돌아간 모녀 또한 잘 도착했다는 문자 한 통 없었다.


다음날아침 투어를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어젯밤 내가 두 시간이 넘게 공포에 떨며 어둠 속을 달려왔던 길이 바로 끝없이 펼쳐지는 석류나무 밭이었다는 것을...


만약 내가 모든 것을 뺏기고 석류나무밭에 버려져 상상 속에서 있을법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면 과연 누가 책임을 질 수 있었을까...

투어컨덕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분노가 느껴졌다.


그 후 한국에 돌아온 나는 피의자 없는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더 이상 튀르키예 출장은 가지 않겠다는 통보를 했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공포감의 깊이는 귀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석류는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과일이 되어버렸다. 


억울한 것은 내가 결론적으론 아무 일 없이 파묵칼레에  잘 도착했기에 나보다 어린 그때의 담당자는 나에게 무리한 일을 시킨 게 아니라고 여겼고 그의 무책임한 요구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만들어주었는지에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이겠지만 가끔씩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겨서 그녀에게 씻지 못할 죄책감을 주었어야 했는데 라는 비정상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생애 처음으로  신경정신과 입구를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인게 정답이다.

몇 달 후 나는 다시 튀르키예 출장을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석류밭 악몽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지 않는 무모한 요구에 굴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도 생겼다.

또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그 담당자도 다른 지역으로 부서를 옮겨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누구도  사람을 사지로 내몰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인솔자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무조건"예스"라고 대답할 의무도 없다...

그때의 담당자가 누군가에게 또 다른 무모함을 강요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모녀가  참으로 안타깝다. 어떤 이유였는지 알 수 없지만   행복해야 할 튀르키예 여행이 두 사람에게 상처만 가득했던 여행지로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이 가장 친해야 할 모녀였기에 더더욱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여행할 때  행복했는지의 기억이 가장 소중하다.

함께했던 사람과의 소중한 기억,  그 순간을 누구와 나누었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 그것이 여행의 본질이며 또한 우리가 다시 꿈꿀 여행이다.


다음번여행도 기억 속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떠나자.

그 사람들과의 추억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여행의 목적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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