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가수 남진 씨의 '님과 함께' 가사에 딱 맞는 풍경이 바로 뉴질랜드다.
이곳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맑은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들. 그런 자연 속에서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지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신입 인솔자로 시작한 지 2~3년이 지나며 나의 전문 지역은 자연스레 호주와 뉴질랜드로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효도 관광팀이 나의 주된 팀이 되었다.
어르신들과의 여행이 나와 너무 잘 맞았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공중목욕탕에 혼자오신 할머님들의 등은 무조건 내가 밀어드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나는그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할 건 없었다. 그저 진심을 다해 잘해드리면 되었다.
가끔은 지루해하실까 봐 노래도 불러드렸고, 비록 미스트롯에 나갈 실력은 아니지만, 그분들께는 내가 송가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칠순 여행팀은 출발 전부터 심상치 않았다. 안내 전화를 드릴 때마다 팀의 대표 어머님은 내가 주의사항을 설명드리면 "응~ 다 알고 있어"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뉴질랜드는 전 세계에서 음식물 검사가 가장 까다로운 나라 중 하나다. 인솔자가 함께 가는 이유도 바로 입국 심사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음식물 반입 금지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고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입국 서류를 써드렸다. 어머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그 손맛 좋다는 전라도 어머님들이 각자의 짐 속에 밑반찬을 꽁꽁 숨겨 오신 것이다. 그 정도가 얼마나 많았던지, 각자의 가방에서 열두 첩 반상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곧바로 검역 직원에게 불려 갔고, 그저 인솔자로써 충분히 안내해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검역관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다. 그때 나는 기지를 발휘해 어머님들과 검역 직원 앞에서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눈물 한 방울을 곁들여가며..
다행히 반입된 음식은 생음식이 아니었고, 쏘리쏘리를 외치는 애처로운 대한민국 어머님들 덕분에 그 밑반찬들은 무사히 뉴질랜드에 입국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현지 가이드분과 나는 전라도 반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어머님들 덕분에 그 여행은 유독 맛있고 풍성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어머님들에게는 또 다른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우리가 방문한 뉴질랜드는 북섬의 화산지대와 남섬의 빙하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섬 일정에는 유황온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 출발 전 수영복을 챙겨 오시라고 안내해 드렸지만, 어머님들은 온천만 기억하셨고, 수영복은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다. 한국에서 온천이라 하면 수영복 없이 들어가는 목욕탕을 떠올리시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우리가 방문한 폴리네시안 스파 온천이 세계 10대 유황 온천 중 하나로, 로토루아 호수를 바라보며 야외에서 즐기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수영복은 필수였다. 결국 어머님들은 온천장에서 대여해 주는 수영복을 입기로 하셨다. 색상은 검정 한 가지, 사이즈는 스몰, 미디엄, 라지. 디자인은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한 스타일이었다.
처음 입어보는 수영복에 어머님들은 살짝 당황하신 듯 보였지만, 싱글벙글하시며 탈의실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잠시 후, 야외 온천장으로 조심스럽게 나오시는 어머님들을 본 순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수영복을 처음 입어보신 어머님들은 앞뒤가 거의 차이가 없는 디자인을 보고 고민 끝에 뒤로 가야 할 부분을 앞으로 입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결정을 하셨는지, 한 분이 그렇게 입으니 다들 그대로 따라 하신것이다.
검정 수영복을 거꾸로 입고 단체로 나오시는 어머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참 난감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어머님들은 불편한 듯 가슴 부분을 부여잡고 수줍게 걸어 나오셨고, 나는 황급히 다시 탈의실로 안내해 드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수영복을 입고 나오셨고, 그제야 어머님들은 평생 잊지 못할 즐거운 야외 온천욕을 만끽하셨고 미스코리아들처럼 단체사진도 찍으셨다.
소녀같은 어머님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효도 관광이라는 타이틀은가진 여행상품은 사라져 가고, 칠순의 나이라도 수영복을 처음 입어보는 분들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후로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뉴질랜드의 자연과 폴리네시안 스파 검정 수영복 이었다.
물론 코로나팬데믹 이후로는 새로운 디자인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그 검정 수영복을 잊을수없다.
이제 아흔을 넘기셨을 그때 그 어머님들은 과연 수영복을 거꾸로 입고 웃음 지으셨던 그 순간을 기억하실까?
그때 찍어드렸던 단체사진을 기억하고 계실까?
첫사랑, 첫 키스, 첫 여행처럼, 우리에게 처음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어머님들도 그날의 첫 수영복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웃음을 나누셨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검정 수영복을 볼때면 그날을 떠올린다.
수영복을 입고 소녀처럼 깔깔대시던 어머님들은 나에게 평생 잊을수없는 70세 소녀들로 남아있다.
그때가 그립다.
소녀같던 어머님들이 그립다.
다시 만날수없어 더 그립다.
90세 쇼녀들로 여전히 행복하시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