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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May 18. 2020

스물 하고도 아홉, 동해안 7번국도

세번째 이야기 _ 화이트

여행은 본래 생각한 경로를 벗어났다. 우리는 영일만을 끼고 호미곶을 한바퀴 돌아서 울산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마지막 날 우리가 가는 길에 7번국도는 없었다. 여행은 끝났다. 아침 일정부터 점심, 늦은 오후까지 애당초 있었던 여행 계획의 큰 틀에서 벗어난 바는 없었으나 심정적으로 이미 여행은 끝나있었다.


물론 이것이 11월 15일 금요일을 상대적으로 '별로'였던 날로 기억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기억에 남지 않느냐고 물으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첫날, 둘째날과 마찬가지로 나의 기억에 충분히 진하게 그려져있다. 다만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스릴의 절정을 끝내고 탑승장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모두가 직감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을 향했을 뿐이다.




거대한 트럭과 끝없는 출근 자전거, 자동차의 행렬은 포항이 거대한 공업도시임을 증명했다. 제철소들이 즐비한 구간을 지나 한적한 호미곶 초입의 한 도로에 멈춰 지나온 곳을 돌아보니 공장이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분주한 현실을 잊지말라는 듯이 저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공장들은 잘 보이게끔 연기를 뿜었다.


곶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먼 바다만 보였고, 발 아래로 잔잔하게 치이는 바닷물은 투명했다. 공업도시였음을 망각하게 하는 파란 지붕, 주황 지붕의 작은 집들이 드문드문 놓인 소규모 촌 마을이 이어졌다. 산비탈의 완만한 곳에서는 작은 밭을 일구고, 바닷가로 나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디나 노동의 현장이다. 생업을 가져야 내일을 굶지 않을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한걸음 멀리 떨어지려 했던 곳에서 오히려 한걸음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호미곶의 그 유명한 손을 지나 구룡포로 향했다. 한창 과메기가 나는 철이라 항구 옆에는 과메기 가판대가 잔뜩이었다.




K는 모리국수를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바다와 싸우고 온 뱃사람들이 뭍에서 따뜻하게 몸 녹이고 허기를 채우라고 만들어주던 식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아구, 홍합 같은 해산물을 넣어 시원한 국물에 칼국수보다 살짝 가느다란 면을 넣은 걸쭉한 음식이었다. 바닷바람 부는 어촌에 딱 어울린다 싶은 음식이었다. 모리국수 집들이 있는 골목의 끝에는 고된 일을 마친 뱃사람들의 유흥을 도맡아줄 것만 같은 주점들이 있었다. 지금도 구룡포의 뱃사람들이 많이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십수년 전만해도 성업하였을 것이다. 뱃일의 고됨과 외로움을 이유로 그런 업장들을 찾았을 것이고, 그 업장들은 없는 고됨과 외로움도 씌워 굴레를 만들었을 것이다. 모리국수 집과 유흥업장. 욕구와 위안과 생업과 노동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또 어떤 일본인들은 생업을 위해 구룡포로 넘어왔다. 언젠가 목포나 군산에서 보았던 일본풍 가옥들이 보이길래 무언가했는데, 포항 구룡포에도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가 있었다. 더 잘 먹고 살아보고자 어장을 찾아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물론 우리 수산자원을 침탈하여 일본인들을 자리잡게 해주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건너온 일본인들의 생업과 구룡포 원주민들의 생업이 보였다.

나는 모리국수 집을 지나, 유흥업장을 지나, 적산가옥을 지나 구룡포의 골목을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대전에서 S와 H를 만나기로 했다. S는 대전에서 공부 중이었고 H는 퇴근 후 바로 기차를 타겠다고 했다. 적당한 시간 여유가 있어 울산까지 내려가 간월재에 올랐다. 억새평원을 향해 산을 오르며 사회생활에 있어서 선배인 K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함께 하지 못하는 R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간월재까지 오른 뒤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울산에서 출발하여 경북 어딘가를 지날 즈음이었는지 우리 앞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 뒤 보았던 가장 붉은 노을이었다. 신기하게도 여행은 심정적으로도, 그리고 이제는 실질적으로도 끝이 났는데, 어딘가를 향해 출발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붉게 태울 힘이 있긴 있구나. 넋놓고 새빨간 하늘에 젖었다. 강렬한 현재였다.




여행은 끝났다. 특별히 무언가를 찾지는 못했다. 애초에 찾으려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십대의 마지막을 특별하게 마무리하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그냥 놀러갔던게 아닌가? 나의 이십대에 대해 깊게 반추하고 회상하며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저 떠났고, 떠난 그곳에서 충실하다가 여행이 끝나갈 때즈음 현실들이 살짝살짝 떠오르며 누군가의 업(業)들에 신경을 빼았겼다. 그 뿐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무려 스물 하고도 아홉이라는 나이에 잔뜩 의미를 부여해봐야겠다는 노력을 했건만,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는 그만큼 당시의 내 처지와 내 시간이 특별히 마음을 빼앗겨 앓고 한탄할만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여행에서 무언가 어마무시한 결론을 얻고 지난 내 삶, 또는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만한 대단한 반성이나 통찰이 떠올랐다면 되려 나는 현재에 충실할 수 있었을까. 삼척의 바다도, 곰치국도 나를 살아있게 하지 못했을 것이고, 공업도시에서 구룡포로 이어진 누군가의 생업들이 뿌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전으로 향하던 길, 어느때보다 새빨갛게 불타던 노을이 없지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아쉽다.


이번 동해안 7번국도 여행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겼다. 무언가 잔뜩 적혀있어 쉽게 알아보기도 힘든, 오래 사용한 노트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페이지이다. 나는 이제 순백의 새 페이지에 나의 글과 나의 색들을 표현하면 된다. 작은 표시도 쉽게 보이는 그런 흰 페이지에 이것저것 티를 내며 나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글과 그림이 잔뜩 차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면,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새로운 흰 페이지가 나타날 수 있도록 노트를 한 장 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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