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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Jul 02. 2020

번영의 조건

[사진과 단상] 터키 파묵칼레

[사진과 단상] 번영의 조건


2019년 3월, 그 유명한 터키의 파묵칼레에 갔다. 카파도키아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와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햇볕이 들이치는 백색의 석회붕을 걸으며 그 뒤로 떠오르는 열기구들을 만났다. 왠지 모를 평화. 잠은 제대로 못 잤음에도 아름다운 경관 속에 존재하는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우리는 파묵칼레 하층부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다 보니 눈치채지 못했는데 상층부 뒤로는 거대한 고대 유적이 있었다. 로마의 전성기 시절을 연상하게 할 만큼 거대했고, 기원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지 않는 도로와 각종 건물터, 그리고 원형극장이 있었다. 단연 백미는 원형극장이었다.


원형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취해버렸다. 높은 원형극장에 올라서니 고대의 도시가 옛 영광을 재현하며 다시 세워졌다. 시장에서는 과일과 가축, 포도주가 거래되었고 원형극장은 매일 밤 잔치 분위기였다. 극단이 무대에서 익살스러운 연극을 선보였고 가수들이 멋진 아리아를 선보였다. 바쿠스가 흘려보낸 풍요는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적셔버렸다.


한껏 취기에 젖어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는 잠시 누웠다. 아직까지 냉기가 감돌았으나 햇볕이 충분히 따스하여 한 숨 자고 일어나기에 좋은 날씨였고, 원형극장 너머로 펼쳐진 장대한 산맥은 가슴을 벅차게 했다. 온갖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솟아났고, 어떤 작은 감상과 생각조차 시간만 있으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라면 마음의 지평이 한 켠이라도 더 넓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곳은 가능성의 땅이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지중해의 환경에서 찾았다. 기후가 따뜻하고 겨울에 비가 와서 비옥한 토양이 많고 작물이 잘 자란다. 사시사철 먹을거리가 풍족하고 날씨가 따뜻하니 생존에 대한 고민이 덜어질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계절과 맞서 싸울 일도 없고 극심한 병충해의 문제도 없으며 주기적인 자연재해도 없다. 지중해의 환경은 참으로 너그러웠다.


그런 땅에서 기원전의 한 청년은 염소 몇 마리 들판에 데리고 나가 풀을 먹였을 것이고, 그동안 그 청년은 나무 그늘에 누워 평화로운 날씨를 즐겼을 것이다. 문득 이 아름다운 날씨와 경치가 주는 미를 찬양하고 싶어진 청년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몸을 흔들었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또 언젠가는 갑자기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하며 인간이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탐구한 바에 대해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번영이 시작되었다. 번영은 환경적 요인에서 기인했고, 넓게 보면 여유에서 기인했다. 먹고 자고 입을 걱정이 없으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길 여유가 생겼고, 그렇게 고대 지중해의 문명에서는 예술, 철학, 수학, 문학이 발달했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하루하루를 걱정해야 한다면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생각들을 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유로운 생각들을 이어나가다 페트병을 베개 삼아 숙면을 취했고, 잠에서 깨고 나니 슬슬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원형극장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나의 일상에도, 잠시잠깐이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고 정리할 여유가 있다면 참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또 동시에, 다음 여행지를 위해 여유 부리지 못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내일은 다르기를 소망하며, 황급히 글을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그럼 이만, 꼭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여유를 찾을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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