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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Dec 25. 2016

인간보편의 애증


 가끔씩 이유 없이 세계가 밉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달걀을 까먹는 호사를 누리다가도 정말, 이유 없이, 불운 없이도 증오가 급습한다. 이건 나를 세계로 내동댕이친 탄생이라는 근원적 사건에 대한 회의이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그렇기에 후회할 수도 없는–일이 어째서 모든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다. 애초에 ‘자존심’이란 것도 탄생의 덕에 생겨난 것임을 알면서도, 제 어미를 탓하는 딸처럼 부들부들 떨고야 만다. 이 굴욕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최고의 복수로서의,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그러나 난 자존심을 최대로 고양시키는 그 선택지를 고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첫째, 나는 말로만 죽음을 희구할 뿐 칼로 스스로를 긋기는커녕 날카로움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하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세계를 미워하는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무거운 쿠션으로 짓눌려 질식당하는 도중에도 ‘천이 부드럽구나’라고 생각하는 바보처럼 나는, 세계를 좋아한다. 의무와 타인과 도덕(善)의 이름으로 나를 어지럽게 만들지만 이따금씩 상처 난 곳에 몇몇 쾌감의 연고를 발라주기 때문이다. 잿빛의 가증스럽고도 보들보들한 손가락으로…….


 그러니 나의 삶, 나아가 사람의 운명은 세계에 대한 애증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가혹한 양가감정 탓에 우리는 울다가도 웃고 하며, 세계라는 회색 주인에 의해 조련 당한다. 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도 이 탓이다. 세계에 대한 증오가 차오를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가운데, 거기에 세계가 발라주는 연고의 효과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연고로 회복되는 것보다 타들어가는 것이 더 지배적이고 빨라지므로 모두의 사인(死因)은 동일하다: 가슴의 돌이킬 수 없는 연소(燃燒). 그리하여 가슴도 함께 잿빛이 되어버리는 가공할 동화(同化).


 멋대로 삶을 종용해놓고선 종국엔 그것을 빼앗는 악취미의 소유자, 세계, 어쩌면…… 신. 오늘도 당신의 쿠션에, 손끝에, 불길에 의해 나는 구테 나흐트, 구텐 모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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