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근원은 무엇이고, 어떤 과정으로 정의되며, 그로부터 어떤 미래의 묘약을 제조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표현은 달라도 심장 뛰고 숨 내뱉는 인간이라면 궁금해했을 것이 자명하다. 특히 커튼을 열었는데도 햇빛이 비치지 않을 때, 책을 펼쳤는데도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 혹은 사람을 사랑했는데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그리하여 마침내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이후 응답사서함으로……"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묻고야 만다. 내가 산다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첫째, 나의 근원에 대하여. 나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셨을 테고, 어느 날은 두 분의 몸이 친밀하게 붙어있었을 것이며, 하나의 난자를 위해 무수한 정자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길을, 마치 사냥꾼이 아내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눈보라로 시야가 막힌 겨울 숲을 헤매는 것처럼 질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년의 사분의 삼쯤 지나서 어미의 밑을 고통스럽게 찢은 내가 응애하고 생명을 통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고, 그들에게도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그들에게도 각각…… 그리하여 셀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 셀 수 없는 접촉과 입맞춤과 예쁜 눈과 예쁜 입술, 아름다운 몸짓과 아름다운 손길이 있었다. 이렇게 끝없는 사랑 끝에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사랑의 딸이다.
둘째, 나라는 과정에 대하여. 내가 살면서 하는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오늘 아침에는 약 7300번째의 샤워를 했고, 세수를 하다가 문득 눈에 띈 뾰루지에 심통이 났으며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어제와 같은 학교로 향하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섬주섬 책을 꺼내 글자들을 읽어나가다가 메모도 하고, 낙서도 하고, 사색도 하고, 낮잠도 자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이 무엇이냐고,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그 답을 찾았다. 하지만 한동안은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특히 작년과 재작년의 나는 정말이지 무의미의 공황 상태에 있었다. 매 햇빛, 매 눈빛, 매 발걸음이 공황의 망망대해를 채워나갔고 심지어는 재채기를 할 때마저도 내가 패닉! 패닉! 하면서, 이물질을 생명력과 함께 쏟아내는 것 같았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항불안제와 항우울제, 살아있는 자들 중 유일하게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낸 뒤 진짜로 죽어버린 소년 시인, 마지막으로 미쳐서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다 죽어버린 중년 철학자였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여러 가지 종류의 종이들을 들추어보다가, 내가 진리와 아름다움을 위해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와 예술, 발견과 감상, 분석과 창작 그 둘을 제외한 다른 것은 도대체가 내게 무거운 짐만을 지어줄 뿐이었다. 나는 학문과 예술을 통해서만 날개를 길러낼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삶을 그것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나의 손을 제단으로 변화시켰다. 날씨가 길(吉)한 날 살포시 두 손을 포개어 하늘을 향해 드높였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제목의 기도문도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진리의 신과 아름다움의 신을 모셨는데 그때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혼령이 내게 다가와 말하기를, 그 두 신은 사실 한 신이란다 하고 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라 묻는 나에게 플라톤은 '사랑'이라는 두 음절을 남겼다. 이성적 몰입도 감성적 경이도 결국은 사랑이라고 하는 상위의 숭고함으로 모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야 나의 근원과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의 현재진행하는 과정마저도 사랑으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나의 미래에 대하여. 어떨 때 나는 내가 다음 순간에 죽어버릴 것만 같다. 실은 죽음이란 매우 개연적이고 가능성 높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위험 요소로 넘쳐나고 살의로 들끓으며, 지금 당장은 평화에 기여하는 듯이 보이는 순한 물건들과 부드러운 말들이 언제 치명적인 무기로 변모할지 알 길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내가 집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이 글이 내가 쓰는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처럼 늘 나는 죽음을 임박해 있는 어떤 것으로 느껴왔기 때문에 미래, 라고 말하면 서른 살이 되어서 가질 직업이라든지 마흔 살이 되어서 볼 조카라든지 쉰 살이 되어서 그만 둘 직장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음, 내 마지막 숨결, 내 마지막 손 떨림, 내 마지막 시야를 생각하였다.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갈까
아니, 어딘가로 '가기’는 하는 것일까? 간다는 것은 운동한다는 것이며, 운동한다는 것은 운동의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내 가슴 속의 붉은 엔진이 영원한 수면에 돌입하면 운동의 주체가 있을 수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삶이 가깝거나 먼 언젠가의 그 때에 끝나버리는 것이 그리 슬프지 않다. 죽음 덕분에 사랑이 가능해지고 또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죽지 않는 존재는 사랑하지 않는다. 죽지 않으면 번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과학적 클리셰가 첫 번째 이유이며 둘째로는 설령 번식의 필요와 무관하게 사랑 그 자체를 즐긴다 하더라도 끝 없는 사랑이란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탓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서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 왜 중요한가?
유한성은 사랑하는 존재, 예컨대 모종의 진리를 담은 책과 연인의 아름다운 목덜미, 를 마주하는 모든 순간의 가치를 배가시킨다. 더 이상 작가가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찢어지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서로가 없는 방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헤어짐이 아쉬운 것이다. 또한, 영원한 것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덧없는 것을 사랑하기는 어려우며, 그렇기에 덧없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그대가 사라진다고 해도 오늘 그대에게로의 평생의 구속을 약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이것은 도대체가 진리와 아름다움이 최고도로 농축된 정수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미래인 죽음마저도 사랑을 위해 봉사시킨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내 삶에 있어서 세 가지의 중대한 계기들에 대해 사색해보건대 나는야 사랑으로 인해,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살고 있다. 나는 곧 사랑이어서, 때론 열의 넘치는 격정이고 때론 잔잔한 평온의 눈길이다. 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원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어딘가를 떠나오는 것이다. 내가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