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아령을 들다 문득 다리가 아파왔다. 아무 생각 없이 소파 앞에 있던 탁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다시 운동을 재개하려는데, 순간 궁금해졌다 - 책상은 앉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위에 앉아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책상인가?
직관적으로, 내가 그 위에 앉아 있든 말든 책상은 계속 책상 같다. 그 말인즉슨 '가장 흔히 이용되는 목적'으로는 책상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때, 책상의 존재 목적은 책상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책상의 목적은 책상이 완수할 수 있는 기능의 부분집합, 혹은 원소인 것이다. 따라서 위 질문을 확장하여, '기능으로써 책상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느 예술가가 책상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그 책상의 기능은 캔버스와 같다.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아이가 비오는 날 책상 아래에서 쭈그리고 있다면 그 책상의 기능은 피난처이다. 가수가 책상 위에서 서서 노래를 부른다면 책상은 무대가 된다. 책상을 사용하는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에 책상의 용도도 무한해질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어느 디자이너가 작은 책상을 모델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면 책상은 패션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물론 이 때, 그 사물이 정말 책상의 일종인지 아니면 그저 특이한 모자에 불과할지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다). 따라서 기능만으로는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목적도, 기능도 무용하다면 책상의 본질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답을 '구조'에서 찾았다. 기본적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기 불가능한 구조라면 책상이라 할 수 없다. 설령 위에서 책상 밑으로 들어간 아이의 예를 들긴 했어도, 그것은 책상을 해당 용도로 사용하는 해당 존재자의 사정일 뿐이다. 책상 자체는 무언가를 그 위에 얹기 위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든 다른 물건과 위치를 구별하기 위해서든 특정한 높이에 고정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상이 될 수 없다. 이 때, '안정적으로' 올려둘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왜냐하면 70도 기울어진 것으로 디자인된 책상은 그 위의 모든 것을 미끄러뜨릴 것이므로 책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문단의 내용만으로는 책상의 본질을 확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언가의 본질이란 그 무언가가 다른 것과 왜 차별화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돗자리 위에 제 아무리 많은 물건을 올려둔다고 해도 돗자리엔 다리가 없기 때문에 책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책상은 다리를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적으로 요구된다. 다리 없는 물건은 책상이 될 수 없다.
다리의 모양이나 개수는 무관하다. 예컨대 정확히 정육면체 모양의 책상도, 다리가 10개 달린 책상도 가능하다. 물론 다리가 있어야 하는 만큼, 다리가 지탱하는 구조물-편의 상 '판자'라 부르겠다-도 있어야 할 것이다. 판자의 모양도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다리가 만약 여러 개라면, 각 다리들의 높이는 되도록 같아야 한다. 판자의 안정성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책상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판자에 존재자(사람이든 도구든)를 안정적으로 올려놓을 수 있어야 함.
2. 판자에 부착된 다리가 판자를 아래에서부터 지탱해야 함.
따라서 책상의 본질은 안정적 판자+다리(혹은 길이가 최대한 비슷한 다리들)로 구성된 '구조'이다. 다시 예술가의 예시를 끌어와서 화가가 책상 위에 작품을 남긴다 해도, 즉 책상을 마치 캔버스의 용도로 사용했다고 해도, 매체는 '책상'이라고 설명될 것이다. 가수가 책상을 무대 삼는다 해도 결국 밟히는 것은 '책상'이다.
'기능'으로 책상의 본질을 정의하는 일이 실패한 반면 '구조'로는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 기능은 그 기능을 이용하는 존재자(인간, 식물, 동물, 심지어 사물까지도 - 예컨대 휴대폰 충전기는 휴대폰이라는 사물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에게 의존하는 반면, 구조는 상대적으로 사용자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동일한 설명을 시간의 차원에서 분석하면, 기능은 동시적이고 즉흥적으로 발동한다. 사용자가 사물을 대할 때, 사용자의 운동과 사물의 상태 변화는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나 구조는 사용자가 사물을 대하기 이미 전에 계획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즉 구조가 확정되는 시간은 이용보다 이른 반면, 기능이 확정되는 시간은 이용과 동일하기 때문에 전자가 더욱 믿을 만한 본질의 원천이다.
그러나 구조가 사용자와 정말 독립적인가, 책상의 본질을 규명한 방법을 다른 사물에도 확장적용할 수 있는가는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깊이 파고든다면 사물을 논한 하이데거의 에세이라도 읽어야 할 판이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간단하게 마치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환영한다.
Cover image: Roy Lichtenstein, Still Life with Palette, 1972
덧붙여서, 구글에 찾아보니 실제로 테이블을 이용해 예술작품을 만드신 분이 계신다.
사진의 출처는 http://ichinichiichinin.blog45.fc2.com/blog-entry-885.html.
ⓒKevin Hunt, <Table Painting>, 2005. 역시 매체에 'House furniture'라고 쓰여 있다. 책상의 구조가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가구이긴 한 것이다. 하단의 벽돌로 인해 심히 기울어져 있어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애초에 책상 자체가 그렇게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다리들의 위치가 바뀐 것이므로 '기운 책상'이지 책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