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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Oct 17. 2022

어머니와 자장면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곳은 작은 가게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동네 야트막한 산에 오르면 좌우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산 밑으로는 논과 밭, 그리고 집들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읍내에 가시곤 하셨는데, 나는 그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나서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뿌리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오히려 나에게 양복을 입혀 주시고, 넥타이를 매어 주셨으며, 모자까지 씌워 앞장 세우셨다. 날씨가 따뜻한 날은 그런 옷차림이 거추장스럽고 땀까지 배어 싫었지만 어머니께서는 항상 나의 단정한 복장을 원하셨다. 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은 위에 형제들로부터 물려받은 헐렁한 옷이나, 옷이 해져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었기 때문에 나의 그런 복장은 눈에 확 띄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보면 “아유 꼬마 신사 납시었구먼. 넌 어쩌면 시골 티가 조금도 않나니. 도회지 부잣집 도련님 같다.” 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곤 하셨는데, 어머니께서는 그 말 들으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읍내에 가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당겨 서점에 가서 어린이 잡지와 동화책을 사고, 문방구에 들려 스케치북, 크레용, 색도화지를 사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필요한 물건들을 사신 후엔 내가 학수고대하는 중국 음식점으로 데려가서는 자장면을 시켜주셨다. 초등학교 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자장면이었다. 집안에 언제나 싱싱한 어패류가 지천이었고, 봄이면 살이 오른 꽃게를 가마솥 가득 삶아놓고, 가을이면 대하를 한 소쿠리 쪄놓아도 그런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장면 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머니는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을 주문하실 때는 언제나 한 그릇이었다. 자장면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며 아예 시키시지 않으셨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특히나 어머니는 밀가루 음식을 누구보다 좋아하시는 분이신데. 바다에서 잡아온 바지락이나 대합, 혹은 꼬막을 넣고 칼국수를 끓이시면 과식을 하셨고, 여름철 콩국수도 젓가락 놓는 것을 서운해하실 정도이셨다. 자장면이 싫으시면 짬뽕이나 밥 종류를 주문하시면 될 텐데 배가 부르시다 소화가 안되어 속이 더부룩하시다며 한 번도 시키신 적이 없으셨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시다가 나중에 접시에 남아있는 단무지와 양파를 드시곤 하셨다. 


어머니께서 자장면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안 것은 철이 들어서였다. 고등학교 때였다. 가족 모임이 있어 중국 음식점에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장면을 아주 맛있게 드시는 것이었다. 몇 가지 요리가 식탁 위에 푸짐하게 놓여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토록 좋아하시는 자장면을 내가 어렸을 적엔 한 번도 드시지 않으셨던 것일까? 

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대학에 보내려면 한 푼이라도 절약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사람 앞일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미루다 보면 차질이 생겨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교육보험에 가입하셨고, 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 관리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 먼 장래를 위하여 그때부터 절약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우리 집이 꽤나 잘 사는 줄 알았었다. 내 옷차림이 남달랐고, 인근 사람들이 우리 집을 부잣집이라고 불렀으며, 주위 사람들이 급전이 필요할 때나 보릿고개 때 식량이 떨어져도 우리 집으로 빌리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나가 살게 되면서 시골 부자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것을 훤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자장면을 맛있게 드시는 것을 처음 본 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앞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면 맛있는 자장면 맘껏 사드리겠다고.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다녀오고,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어쩌다 쥐꼬리 만한 용돈 드리는 것으로 내 도리를 다 한 것처럼 생각했다. 어머니는 12년 전에 다른 나라로 떠나셨다. 저 세상에서는 자식 생각 내려놓으시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어머니가 내 어머니여서 정말 행복했었다고……. 다음에 태어나도 어머니의 아들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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