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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Oct 25. 2022

과수원, 그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추억



뉴욕에 살 때이다. 어느 깊어 가는 가을날, 가깝게 지내는 교민 네 가족과 외식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중 누군가가 돌아오는 주말에 사과를 따러 과수원에 가는 게 어떠냐고 의사를 물었다.
과수원? 우리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그것도 뉴욕에서 과수원이라는 말이 너무 정겹게 들렸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과수원들. 야트막한 비탈진 산자락, 햇빛이 마음껏 내려 꽂히는 곳이면 으레 자리 잡고 있는 과수원. 국도를 달리거나 기차여행을 하다가 문득 창으로 시선을 주면 어김없이 펼쳐지던 과수원, 흐드러지게 핀 과꽃만 봐도 포근함으로 만사를 잊게 해 주고, 빨갛게 매달린 사과만 보아도 풍요로움으로 포만감을 주던 과수원.
우리는 모두 과수원 가는 것에 찬성했고, 주말이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과수원 가는 날은 화창했다. 하늘은 헤엄치고 싶도록 맑고 깨끗했다. 우리는 어렸을 적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16인승 승합차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목청껏 대화하고 웃곤 했다.
과수원은 뉴욕에서 두 시간 거리의 뉴저지에 있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는 과수원을 간다는 것은 보물찾기 놀이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과수원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땅덩어리가 큰 나라이기 때문에 과수원 규모부터가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우리는 입구에서 관리인으로부터 안내의 말을 들었다. 사과를 딸 때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꼭지를 잡고 부러뜨려라. 그냥 잡아당기면 가지가 부러져 내년의 사과 수확에 차질이 생긴다. 과수원 내에서는 아무리 많은 사과를 따 먹어도 공짜다. 그러나 가족 당 나누어준 비닐봉지 (우리나라 종량제 20리터 크기)에 채운 것은 20달러 받는다 라는 내용 등이었다.


드디어 사과 밭에 들어섰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넘는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빨갛게 익은 사과들은 연약한 가지에 용하게도 매달려 있었다. 사과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는 땅을 향해 휘어져 금방이라도 툭툭 소리를 내며 꺾일 것 같았다.
나는 사과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몇 개를 따 먹었다. 직접 나무에서 따 먹는 맛은 확실히 달랐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맛이었다. 비가 적고 풍부한 일조량은 당도가 높은 사과를 만들고, 선득한 밤과 따스한 낮의 온도 차이에 오그라들었다 폈다를 반복할수록 육질이 단단해져 사각거리는 맛이 있다는데 바로 이곳이 그런 곳 같았다.

사과가 목에까지 차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자 우리 일행은 사과를 따서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야트막하게 달린 사과도 지천이었지만 더 실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따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든지 다른 것에 비교해 작다든지 혹은 때깔이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다른 것을 따서 비닐봉지에 넣었다. 사과를 하나라도 더 넣기 위해 봉지를 수시로 좌우로 흔들며 윗부분까지 가득 채웠다. 그래도 욕심이 차지 않아 남자들은 상의 양쪽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여자들은 손가방에 몇 개씩 집어넣었다.


입구에서 관리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잠바 혹은 가방 속에서 숨겨온 사과를 꺼내어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이며 낄낄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 그런 낭비적이고 비난받을 짓을 했는지. 솔직히 나는 남의 집에서 신발 바닥에 묻혀오는 먼지조차도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생활했었는데 말이다. 과일 가게나 슈퍼마켓에 가면 지천으로 쌓여 있고 그렇다고 비싸지도 않은 사과를.......
과수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그런 비신사적인 행동을 보았다면 얼마나 눈살을 찌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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