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가 안절부절 못하고 나한테까지 부탁하는 거 보면 민희에게 뭔가 비밀이 많은 것 같아. 민희도 기껏해야 스물 세 넷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린 친구가 화려한 연예인 생활 뒤에 어떤 비밀을 가지게 된 걸까. 내 딸은 연예인 시키지 말아야지. 평범한 게 최고라네. 뭐 그 정도의 인물도 안 되지만 말이야.”
“연예인 할 인물이 따로 있나요? 다듬고 꾸미면 화장발, 카메라발로 다 하는 거지요.”
“이 친구 참 재미있는 친구네. 좋았어. 내일 또 보자구.”
“내일요? 내일은 또 무슨 일이에요?”
“어. 매니저가 지금 영국으로 오고 있다는군. 내일 아침 히드로 공항에 도착할거야. 한번 맡은 일은 끝을 봐야지. 안 그래? 미래의 의사양반. 진단 이후엔 치료까지 하는 거 아니겠어?”
“아. 네……. 그런데 아르바이트 비는 지급하시는 거지요?”
“물론이지. 민효가 받은 만큼 쳐서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여자친구도 없는 것 같은데 내일 아침 9시 대사관 근처 카페 #1으로 나오라고…….”
영욱은 잠시 머뭇거렸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이 수상한 일에 뛰어들 것 인가. 잠시의 머뭇거림 뒤에 영욱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비를 두 배로 주세요. 전 통역도 하지만 의학적인 자문 역할도 할 수 있으니까요.”
김성현 영사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해 하는 듯 보였다.
“그래. 두 배로 주지. 경태… 아니 민희 매니저가 그 정도는 줄 것이야. 영욱군. 그럼 내일 아침 카페에서 보자구.”
두 사람은 차가운 저녁 공기를 가르며 레인즈버로우 호텔을 나와 각자 집으로 향하였다.
민희의 비밀여행
영욱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대사관 근처 카페 #1으로 향하였다. 아침이라 차를 마시며 아침을 즐기는 영국 사람들과 버킹엄 궁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테이블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어제 만난 김성현 영사와 다른 한 남성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영욱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자리에 합석했다.
“제 잘못이에요. 제 잘못이라고요. 간다고 할 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장시간 비행과 시차 부적응으로 잠을 한 숨도 못 잔 것으로 보이는 남자는 민희의 핸드폰과 노트북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영욱은 잠시 동안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 영욱군. 왔군. 인사해. 민희 매니저 조경태라고 하고……. 이 쪽은 캠브리지 의대에 다니는 영욱 홈즈 군이야. 통역과 자문을 맡아주기로 했어. 똑똑한 청년이니 도움이 될 걸세.”
조경태는 충혈된 눈으로 영욱과 악수했다.
“아, 그리고 경태. 영욱군 아르바이트 비는 자네가 대는 거지? 나도 월급이 빠듯해서 말이야. 그리고 영사가 원래 이런 일 하는 거 아닌데 자네가 특별히 부탁해서 이런데 따라다니는 거 알지. 자네가 고향 후배가 아니었다면 어제도 가보지도 않았을 거야.”
김성현 영사는 경태에게 말했다.
“민희가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네. 얼마든지 낼게요.”
김영사는 영욱에게 ‘봤지?’라는 표정으로 눈짓을 했다. 힘들어하는 사람 옆에서 돈 이야기나 하는 김영사가 영욱은 한심했다.
영욱은 그때 뭔가가 생각난 듯 말하였다.
“아. 어제 런던 경찰이 Mr. 오라는 사람이 어제 방을 두 개 예약했고 민희가 죽은 채로 발견된 방이 그 둘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회원이 아니면 예약이 불가능하구요. 민희씨는 회원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호텔에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회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매니저이시니까 민희가 누구를 만나는지 아실 거 같은데요.”
“민희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아이였어요. 제가 아는 한 함께 여행을 갈 만한 남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 힘든 건 알지만 이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나도 집에 빨리 가봐야 되고……. 내가 몸이 좀 약하다네. 일단 그 핸드폰 안에 단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핸드폰을 열어보게. 비밀번호로 잠겨 있어.”
“저는 민희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모릅니다. 본 적도 없지만 보려고도 안 했어요. 그럴 필요조차 없었으니까요.”
“음. 그래도 한 번 해보게. 하루 종일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조경태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비밀번호를 풀 수 있었다.
“비밀번호는 0913. 키아라의 창립일이었어요.”
“어서 열어보게. 통화 내역이나 문자메시지, 메일 같은 것에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몰라.”
조경태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경태를 영욱과 김영사는 숨죽이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민희의 휴대폰에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조경태는 부르르 떨었다. 영욱과 김영사는 사진을 보기 위해 경태의 자리로 모여들었다.
“아니, 이 사람은 삼다그룹 오회장 아들 오민우 아닙니까?”
영욱이 말했다.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신문과 방송을 꾸준히 보는 영욱이었다.
“오민우라면 삼다그룹의 외아들로 꽤 바람둥이 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영욱의 말에 경태가 말하였다.
“네. 맞아요. 연예계에도 여러 명 거쳐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심하라고 했는데 민희도 빠져들었나 봐요.”
경태는 약간 화 난 듯이 보였다. 사진은 오민우와 민희가 환한 표정으로 찍은 셀카였다.
“잠시만요. 이 사진 런던에서 찍힌 거네요. 빅벤과 런던아이가 뒤에 있잖아요.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알 거 같군요. 찍힌 날짜가 어떻게 되나요?”
영욱은 민희와 민우의 셀카 뒤편으로 보이는 시계 탑과 큰 회전 놀이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런던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오늘 오회장 아니 오의원이 런던에 온다고 하는 것 같던데…….”
김영사가 언뜻 생각나는듯 말했다.
“진짜에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오늘 아침 여기 나오기 전에 대사관에서 들었으니까 아마 맞을 거야. 영국 의회 체험을 하러 온다고 하더라구. 이거 민희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거 아닐까? 경태?”
영욱과 김반장이 조경태를 쳐다보았다. 경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이… 사진이… 그저께 찍힌 거에요. 죽기 바로 전날이라구요.”
세 사람은 왠지 모를 섬칫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어서 가세. 지금 영국 국회의사당에 있을 거야. 아침에 대사관 직원들이 수행해서 간다고 나갔으니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