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해외에서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소식에 더 민감해지고,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과 자주 연락을 하게 된다.
몰타와 한국은 시차가 7~8시간 정도 차이가 나기에, 이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오후 시간이 되면 한국은 저녁이나 밤 시간대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을 마친 시간이어서, 비교적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 이야기부터 정치, 사회 이슈까지, 종종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우려스러운 부분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해외에 있다고 해도 유튜브 같은 플랫폼을 통해 국내 소식을 접할 수는 있다. 다만, 가끔은 내가 편향된 정보만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가 점검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현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영상을 시청했더니, 알고리즘이 줄줄이 비슷한 성향의 콘텐츠를 이어 보여준다. 그 영상들을 보다 보면, '정말 잘못하는 게 많은 건가?' 싶기도 하면서도, 찬반 양측의 시선을 모두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집권당의 행보에는 실망이 더 커지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내가 돌아갈 때쯤이면 조금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그렇게 한 번은, 한국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장 후배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 후배는 내가 고향 근처로 발령을 받고 첫 해에 입사한 친구였다. 수습 과정을 거쳐 타 부서로 배치됐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같은 동네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가 집 가까이 산다고 해서 무조건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후배는 유순하고 남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몇 번 사적으로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이곳 몰타로 유학을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후배가 질병휴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딘가 마음이 쓰였다. 순한 성격 탓에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많이 아픈 걸까.
사실 나 역시 첫 직장 시절엔 썩 좋은 출발을 하진 못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두 번째 직장인데, 첫 직장에선 순종적이었던 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을 억누르지 못했고,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일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 유니폼을 벗어던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현재의 직장도 처음엔 순탄하지 않았다. 지역 발령을 받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무단결근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를 찾아와 이유를 물어봐 주고, 조용히 들어줬던 선배가 있었기에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보다 어려운 후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도움을 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물론 결과는 매번 달랐다. 어떤 후배는 상담과 도움 끝에 퇴사를 선택했고, 또 어떤 후배는 내 조언을 새겨들으며 다시 마음을 잡고 잘 적응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현재 휴직 중인 그 후배는 다음 달이면 복직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할 테지만, 나는 그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후배는 비록 젊지만, 나의 연락에 정중하게 반응해 주었고, 내 외국 생활에 대한 안부도 먼저 물어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기에, 나는 여행을 권했고, 혹시 몰타에 올 수 있다면 나를 방문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후배는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투자는 사치처럼 느껴진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심함이라기보다는, 오랜 휴직으로 약해진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대화가 지루해질까 봐, 나는 이곳 몰타의 관광지 사진과 음식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사실 나도 처음엔 한식을 먹을 생각으로 왔지만,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한식 한 끼를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걸 깨닫고는, 주로 파스타나 리소토를 먹고, 가끔 한식을 특별식처럼 즐기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후배는 오히려 나를 걱정해 준다. 생각이 깊은 아이구나 싶었다.
나와 그 후배는 20년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곧 다가올 추석에 대한 이야기, 유럽 생활의 만족도, 앞으로의 계획까지...
그 후배는 나의 결혼 생활, 자녀, 직장에서의 경험을 들으며 부럽다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반대로, 아직 목표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고, 내 삶에도 아직도 고민이 많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자 후배는 “그래도 선배처럼 가정도 있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삶이 자신에게는 충분히 부러운 삶”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살아 계시고, 그분들 또한 현직에 계시며 후배를 믿고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자산 아니겠느냐”라고.
그 말을 들은 후배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뿐”이라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나의 유학기와 외국 생활을 이야기했고, 자연스럽게 현재 집필 중인 책 이야기도 꺼냈다. 후배에게는 내가 유학뿐만 아니라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왔는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내가 생각해 둔 책 제목을 이야기해 보았다.
역시 젊은 세대라 그런지, 내가 정한 길고 서술적인 제목 대신 짧고 함축적인 제목을 제안해 주었다. 예를 들어 “안단테”, “쉼표”, “안 쉼” 같은 감각적인 제안도 있었다.
그 조언을 들으며, 나도 내가 정한 제목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후배는 예의를 지키며, 내가 정한 제목이 “시골 할머니가 고봉밥을 꾹꾹 눌러 담은 밥그릇 같은 정겨운 느낌”이 난다며 따뜻한 말도 함께 덧붙여 주었다.
나는 내게 있는 유럽 여행 계획을 이야기했고, 후배는 그런 내 삶이 더 부럽다고 솔직히 말해 주었다.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마침 오늘은 한국에서 온 한인 부부를 만나기로 한 일정이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대화를 마쳤다.
현재 후배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에게 맞는 일과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좋은 직장인으로, 좋은 선배로, 좋은 아빠로 성장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