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왜 하필 나한테만...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10일간의 딸과의 여행을 마치고 딸을 먼저 서울로 보내고 난 뒤 늦은 밤 몰타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살다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국내에서 가족 여행을 갔을 때에는 중간에 헤어진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한국이 아닌 그것도 로마의 공항에서 딸과 헤어져야 한다는 기분이 참 묘했다. 딸을 보내고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손을 흔들며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쉥겐 협약 덕분에 유럽 29개국 사이를 여행할 때는 입국 심사를 별도로 받지 않아도 되어,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출국장으로 나갈 수 있다. 이런 간편함은 유럽 여행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몰타 국적 항공사를 이용했다. 이전까지는 라이언에어나 이지젯 같은 저가항공을 주로 이용했지만, 우연히 시간대가 맞아 몰타 국적 항공편을 선택하게 되었다.


사실 조금 기대했었다. 몰타에 살고 있고 몰타 비자를 갇고 있는 입장에서, 몰타 국적 항공사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라이언에어나 이지젯을 이용할 때 겪었던, 소소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던 아시안으로서의 소외감과 무시가 몰타 항공에서는 없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출발 예정 시간은 밤 9시였지만, 별다른 안내 없이 20여 분이 지나서야 탑승이 시작됐다. 공항의 문제인지 항공사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마음을 가볍게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라이언에어보다 더 작은 기종이었고, 좌석은 좌우 3열씩 배치된 구조였다. 입구에서는 여성 승무원이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전 항공사에서는 아시안인 나에게 인사를 생략하거나 고개를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챠오”라고 인사하자 그녀는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내 자리는 조종석 가까운 쪽, 비행기 오른편 창가였다. 자리에 앉아보니 남자 승무원 둘이 서로에게 “47”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었고, 오늘 비행기에 총 47명의 승객이 있다는 뜻 같았다. 늦은 밤 시간대라 승객 수가 적어 보였다.

내 좌석 앞 줄에는 부부와 세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밤하늘 아래 출발하는 로마의 공항은 오스티아라는 해안 도시 근처에 있어, 이륙 시 비행기 창밖으로 바다가 어슴푸레 보이는 풍경이 인상 깊었다.

이륙 후 20여 분이 지나 안정 고도에 도달하자, 승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가기도 했지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물세례에 놀라 천장을 올려다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앞 좌석을 보니 아이 엄마가 물병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얼굴과 안경,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물은 내 머리뿐 아니라 상의와 바지까지 적셔버렸다. 그런데도 앞 좌석의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미안해요, 기압 때문이에요”라는 짧은 말만 남겼다.


예고 없이 벌어진 일이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또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질까 걱정되어 뒷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조금 냉정을 되찾았지만 억울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단순한 실수일 수는 있어도, 최소한 정중한 사과 한마디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가족은 정중한 사과도 하지 않고 기압 때문이라며 변병을 하였고, 항공사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앞자리의 남성에게 직접 다가가 정중히 말했다.


“기압 때문이라지만, 당신 가족 때문에 제 옷이 젖었습니다. 그 자체로 기분이 몹시 나쁘고, 이런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는 “아까 사과했잖아요”라며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해명이었을 뿐, 사과라고 부를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정식 사과를 요구했지만, 대화는 감정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 가족의 친척으로 보이는 남성이 나타나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내 가슴을 밀며 물리적으로 제지하려 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손대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승무원이 다가와 나에게 자리로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말없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승무원들은 그 가족과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에게는 어떤 설명도, 위로도 없었다. 마치 내가 항의할 자격도 없는 사람인 양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게 내 입장을 설명했다. “제 옷은 젖었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탁비를 청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승무원은 “그건 단순한 물일 뿐”이라며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마치 내가 과하게 반응하는 사람인 양 취급되었다. 결국 “세탁비 같은 건 비행기 밖에서 따지세요”라는 말만 들은 채, 나는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물론 이 일이 그리 큰 사건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해자의 무책임한 태도와, 항공사 직원의 무시와 편파적인 대응은 분명히 문제였다. 나는 정당한 항의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더 화가 났다.


심지어 착륙 직전까지 평소 승무원이 앉지 않던 일반 좌석에 한 승무원이 나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행동을 할까 감시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착륙 후에도 그 가족은 맨 앞줄로 먼저 내리게 배려받았고, 나는 그들과 마주칠 기회조차 없이 비행기를 떠나야 했다. 어떤 정리도, 해명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단지 물이 쏟아진 사건이 아니었다. 나를 외국인, 특히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실망이었다. 내가 유럽인이었거나, 유창한 현지어로 대응할 수 있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을까?


출발 당일 아침, 호텔 화장실에서 수건이 스르르 떨어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불길했던 그 예감은 결국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이 일이 단순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해자의 무책임한 태도, 항공사의 무관심은 절대로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소수자로서의 억울함을 넘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원했을 뿐이다.


앞으로 유럽 사회가 인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성숙하게 대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시안도, 누구도 쉽게 보지 않기를.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신이시여!, 아무리 그렇지요? 비행기에서 물벼락이 왠일인가요?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유를 알려 주세요?라고 신께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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