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콜롬비아 출신의 아벨미는 호텔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그는 보통 오후 3시에 출근해 밤 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이후,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친절한 아벨미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나는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반면, 최근까지 함께 살다가 떠나갔던 칠레 출신의 알바로는 같은 영어 유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영어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나와의 대화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자주 외출을 했고, 집에 머무는 시간도 짧았기에 우리 사이에 특별한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내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벨미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출근 전 잠깐이거나, 밤늦게 퇴근한 후에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미는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늘 말을 걸어주었고, 그런 그의 태도에 나는 늘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에서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으면 짜증을 내거나 외국인과의 대화를 피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아벨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몇 년 전, 그 역시 몰타에서 영어 유학생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기에 내 마음을 더 잘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매달 5일은 이 집의 월세 납부일이다. 아벨미는 늘 친절하게 우리 하우스 그룹 톡방에 월세 날짜를 공지해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월세를 내는 날이 되었는데도, 최근에 새로 이사 온 나이지리아 출신의 피우스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도 그의 방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피우스는 처음에 자신이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온라인으로 의료 상담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내며 식사도 직접 만든 음식을 방 안에서 혼자 해결하곤 했다.
사실 처음 그가 이사 왔을 때, 나는 ‘낮 시간을 함께 보내며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혼자만의 공간을 고수하며, 나와는 거의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점점 나는 심리적으로 그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고, 오히려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다.
한편으로는 전에 쓰던 알바로 방에 귀신이 씌어서 비슷한 사람이 연달아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월세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자 나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톡을 보냈다.
“Pius, 어디에 있나요?”
“알려주세요.”
간단한 메시지였지만 끝내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 다음날, 나는 아벨미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혹시 피우스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피우스는 평소 아벨미와는 간간이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에게는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벨미 역시 피우스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며칠 전, 아침 6시 조금 넘은 시각에 피우스가 집을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을 눌러서 내가 현관문을 열어준 적이 있었다. 정신없는 이른 아침이었고, 굳이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문만 열어주고 내 방으로 돌아왔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가는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그저 열쇠를 두고 나갔다가 돌아온 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고, 결국 아벨미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 그의 방을 직접 열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옷장도, 서랍도, 책상 위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집의 출입에 필요한 열쇠 세 개만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벨미에게 알리자, 그는 피우스가 헝가리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정말 단순히 며칠간 여행을 간 사람이라면 짐을 전부 정리하고 열쇠까지 두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아벨미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싶어 했고, 내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직접 자신이 방을 확인해 본 뒤에 판단하겠다고 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 아벨미가 퇴근 후 집에 돌아왔다. 그의 방을 살펴본 아벨미도,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며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벨미는 일단 피우스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고, 다음 날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집주인에게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사실 나도 이 상황을 과도하게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그가 며칠 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벨미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어”라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벨미와의 대화가 끝나고 내 방에 돌아오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피우스의 행동을 돌이켜보면, 그가 짐을 싸서 떠난 것은 명백해 보였다. 왜 그는 그렇게 조용히, 말없이 사라진 것일까?
그가 정말 의사였을까? 그가 말한 직업이나 신상은 사실이었을까?
매일 밤 그의 방에서 밤새 누군가와 싸우는 듯한 소리가 자주 들렸는데, 환자와 의료 상담을 하면서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다시 떠올랐다.
그는 나에게 박사라고도했고, 아내가 헝가리에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헝가리에 갈 예정이라고 했을 때에도 나에게 전혀 반응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저 그가 무심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불편해졌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앞으로 남은 세 달 동안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살아도 내 영어 실력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애초에 나는 외국인과의 하우스 쉐어를 통해 영어를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실력을 키우려 했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그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남은 한 달만이라도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 호텔에서 혼자 지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새로운 임차인이 오더라도 또다시 평온한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더 안정적인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집과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이민자들과의 삶 자체가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으나, 매번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터져 나와 때로는 다이나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없는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