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떠나는 자와 머무는 자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나이지리아 출신의 피우스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새로운 임차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들어오겠지 싶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 임차인이 늦게 들어올수록 지금 이 집에 사는 두 명이 공과금을 나눠 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세 명이 나누던 비용이었기에 큰 부담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그 몫을 감당해야 하니 그만큼 지출이 늘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청구된 인터넷 요금은 36유로였는데, 평소에는 3명에서 나누어 내던 것을 둘이 부담하게 되자 한 사람당 내야 할 금액이 거의 두 배로 늘어나 버렸다. 적은 금액이라 해도 이런 차이는 금방 체감된다.


오늘은 랭귀지 스쿨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벨미가 부동산에서 손님을 데리고 오후 5시에 집을 방문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며칠 전부터 아벨미는 새 임차인을 빨리 구해야 한다며 혼자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두었는데, 덕분에 집은 아주 깔끔해졌다. 청소를 같이 도와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오늘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약속해 둔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 손님 방문 시간이 저녁 식사 시간과 겹쳐버렸다.


나는 원래 외부 식당에서 근사하게 식사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벨미가 식당을 가는 것 대신에 음식 사러 나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5시 정각, 이전에 나에게 이 집을 소개해 주었던 같은 부동산 중개인 콜롬비아 출신의 카밀로가 튀르키예 청년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20241110_121622.jpg 어디서든 사진에 호쾌한 사람들


카밀로는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어서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곤 했던 사이였다. 오늘도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거실과 피우스가 사용하던 방은 아벨미 덕분에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흠잡을 데가 없었고, 방을 둘러본 튀르키예 청년도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때 카밀로가 청년에게 “6시에 또 다른 손님이 온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 말에 '카밀로는 영업 수완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자를 암시함으로써 결정을 유도하려는 전략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나는 아벨미에게 사실 6시에 오는 손님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더니, 아벨미는 자기는 모르겠다고만 했다.

어쨌든 저녁식사는 계속 미뤄졌고, 결국 6시에 방문 예정이던 손님이 정말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5시 반쯤 근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오기로 했다.


이곳 몰타의 레스토랑은 주문하고 음식을 받기까지 꽤 오래 기다리는 게 일상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오늘 주문한 치킨은 불과 5분도 안 돼서 나왔다. 유럽에서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초스피드 서비스였다.

집에 돌아와 음식을 펴고 먹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유럽식 치킨은 한국처럼 바삭하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준 샐러드와 감자칩에 케첩을 곁들여 식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정말로 6시가 조금 지나 카밀로가 또 다른 손님을 데리고 다시 집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30대로 보이는 아르헨티나 여성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몰타에서 어학 과정을 마치고 발레타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벨미와 카밀로, 그리고 그녀 모두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이다 보니 셋은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옆에서 듣고만 있었지만, 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매우 신중한 태도로 방을 둘러보고, 월세 외에도 공과금 같은 실질적인 부분을 꼼꼼히 질문했다.

나는 아직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한 상태였고, 그녀가 너무 시간을 끄는 것 같아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방은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이고, 원래 월세가 520유로였지만 지금은 450유로로 내려서 굉장히 좋은 조건이에요.”

그러자 그녀는 내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당신이 이 방에서 살면 되겠네요?”라고 받아쳤다.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방해꾼처럼 그녀에게 보인 걸까 싶어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이어서 설명했다.

“방금 전에 한 청년도 이 방을 보고 갔어요. 이 방은 크고 조용해서 정말 살기 좋아요. 하지만 저는 이제 내가 이 집에서 머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굳이 방을 옮기진 않으려 해요.”


그녀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더 말을 이어가는 건 의미 없을 것 같아 피우스의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카밀로가 집을 떠났고, 나는 남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카밀로가 아벨미에게 전화를 걸어와 튀르키예 청년이 이 방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확실히, 세계 어디서나 남자들이 여자보다 결정을 더 빠르게 내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튀르키예 청년도 집을 둘러보며 우리에게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물었고, 집의 구성원이 마음에 든다며 결정한 것 같았다.

아벨미에게 그 청년의 직업을 묻자,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라고 했다. 언뜻 보기엔 영어도 곧잘 하는 듯했는데, 랭귀지 스쿨에 다닌다고 했다.


이전 임차인이었던 칠레 출신의 알바로도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고 나와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아 어색한 시간이 많았다. 말을 걸어도 종종 번역기 앱을 사용할 정도였다.

반면 이번 튀르키예 청년은 훨씬 적극적이고 실력도 어느 정도 되는 듯해, 앞으로는 대화도 잘 통할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다.


처음 집을 구할 때 구성원의 국적이나 직업, 언어 능력까지 조금 더 신중히 고려했다면 영어에도 더 빨리 익숙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한국에서도, 여기 몰타에서도 나는 늘 원하는 대로 살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주어진 대로, 상황에 맞춰 적응하며 살아왔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더 신중하게 결정했다면 몰타에서의 삶도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재미있지 않았을까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음 여행 출국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동유럽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를 중심으로 한 여행이다. 이 지역은 약 10년 전 유럽 첫 여행 때 방문했던 곳이기도 해서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투어 패키지로 하루도 채 머물지 못하고 도시를 옮겨 다녔지만, 이번에는 한 도시에서 최소 3일 이상 머무는 일정으로 계획했다.

잘츠부르크나 캄머구트 같은 익숙한 도시들은 이동 시간 때문에 제외했다. 왕복 6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가까운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두 나라 수도 사이의 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수준이라고 하니 무척 흥미롭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 집엔 이미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겠지. 그리고 그건 나의 몫이 아닌, 이제 이 집에 남겨질 이들의 몫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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