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오늘은 토요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습을 하던 평일과는 달리, 주말만큼은 조금 느긋하게 시작해도 되는 날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했던 나로서는, 학생이 되어 다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심리적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룸메이트 요한은 서른을 앞둔 청년인데, 미혼인 그는 보통 주말 아침을 12시까지 푹 자며 보내는 편이다.
나는 일찍 눈을 떴고, 몇 번 뒤척이다 조용히 키친룸으로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평일에는 늘 예습과 숙제로 분주하지만, 주말만큼은 공부는 하지 않기로 다짐해 두었다.
그런데 막상 “하고 싶은 걸 해보자”라고 결심해도,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저 유튜브를 보거나 SNS를 정리하는 정도.
조용한 키친룸에 앉아 있노라니 문득 한국 생각이 났다.
몰타는 아침 8시인데 한국은 오후 4시쯤. 이 시간엔 한국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은 타이밍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외로움과 낯섦을 달래려 친구, 동료, 가족들에게 전화를 자주 걸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사람에게는 다 연락을 한 상태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외로움을 많이 나눴다는 뜻이겠지.
아침 햇살이 천천히 창문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 섬은 한국의 강화도만큼 작고, 낮에는 온화하지만 밤에는 바람이 거세다.
어딘가 제주도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주말엔 관광지를 돌지 않는 이상, 나는 주로 수영장에 들르거나 운동장에 가곤 한다.
최근엔 콜롬비아 등 남미 친구들이 수영장 옆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는 걸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아침 9시, 수영장에 도착했다.
평일에는 한 레인씩 넉넉하게 쓸 수 있었지만, 주말이라 그런 여유는 없었다.
옆 레인에는 동양인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말을 걸어보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무심한 표정을 보였기에 그냥 조용히 수영을 마쳤다.
탈의실에서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져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을 나왔다.
운동장에 들러보니,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목이 말라 근처 가게에서 카푸치노를 주문해 벤치에 앉았다.
러닝 중인 현지 사람들을 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10시 30분이 지나도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스포츠 쇼핑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이 섬에 올 땐,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살아보니 그 생각은 기우였다.
작은 섬이라 길을 잘못 들어도 금세 되돌아갈 수 있고, 약속에 늦을 일도 거의 없다.
여기 와서 정말 느낀 것은, 한국을 벗어나면 한국에서만 쓰던 네이버는 거의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네이버 하나로 모든 정보를 해결했지만, 이곳에선 ‘구글’이 전부였다.
몰타의 버스 도착 시간, 노선, 경로는 전부 구글맵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주소나 건물 이름만 입력해도 SNS나 페이스북까지 연결되어 필요한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어느 곳으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또 이곳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은 “WhatsApp”이다.
유럽은 개인정보 보호를 중요시해서 왓츠앱이 보안성이 높은 앱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사용하고 있다.
구글맵, 왓츠앱, 택시앱 같은 것들도 처음엔 낯설었지만,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있다.
그만큼 적응도 되고 있다는 증거겠지.
이 작은 섬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리고, 전혀 다른 시스템에 적응해 가는 나를 스스로 대견하게 느낀다.
구글이라는 전 세계적인 포털의 힘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조금씩 발을 디디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룸메이트 요한이 다른 나라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아직 같은 반의 한국인을 데려온 적은 없다.
덕분에 이곳에서 한글을 쓸 일도 없고, 네이버를 접속할 일도 없어 "혹시 내가 한글을 잊는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운 걱정도 들었다.
처음 이곳에 와선 1층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것도 겨우 가능했는데, 어느새 한 달이 지나 안정된 일상을 누리고 있다.
15시간 거리, 유럽의 작은 섬에서 살아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또 하나의 주말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