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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3라운드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전날 집주인과의 신경전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학교 기숙사에서 요한과 함께 지낼 때보다 지금 내 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 그나마 마음이 편해 다행이었다.


아침 6시, 집주인의 방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런데 그녀는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지 않은 듯 조용했다. 나만 깬 채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전날 있었던 갈등이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그래도 어제 잘 마무리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건 자존심이 상했고, 무엇보다 부당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참고 맞춰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 불편한 공간에 조금이라도 덜 있고 싶어서, 얼른 나가 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엌에서 조용히 시리얼을 준비하고 식빵을 굽기 위해 그릇을 하나씩 조심스레 꺼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내 모습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더욱 집주인의 얼굴을 보기 싫어졌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약식으로 세수와 면도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녀가 이미 거실 식탁에 나와 앉아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그녀가 건넨 “Hi”라는 인사에 순간 당황했고, 나도 모르게 “깜짝이야”라는 말이 한국어로 튀어나왔다.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걸 그녀에게 감추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가방 두 개 책가방과 수영장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을 나왔다.


사실 이른 아침에 수영장을 간 적은 없었다. 오늘은 그저 집을 벗어날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고 집주인의 얼굴을 피하고 싶었다.

걸어서 수영장에 가는 길, 그녀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아마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기 어려우니 문자로 자신의 입장을 전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자의 내용을 읽고 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내가 아침 일찍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렇게 적어 보냈다.


“매일 저녁 7시 이전에는 식사를 마쳐주세요. 밤 8시 이후에는 저와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증거 1

이건 명백한 통제였다.
이웃들을 핑계 삼아, 내 생활 자체를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집에서 밥을 먹는 것도 허락받아야 하나?’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수십 번을 고민했다. 결국 이렇게 보냈다.
“제가 기계인 줄 아시나요? 당신은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왜 이렇게 엄격한가요? 이 집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아닌 것 같아요. 타국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조금의 관용이라도 베풀 순 없나요?”

쌓이고 쌓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증거 2


한 번 화가 나니, 예전 일까지 떠올랐다.
며칠 전, 그녀는 “식사를 하면 그 즉시 식기를 정리하라”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틀 전 밤 9시에 그녀의 친구가 와서 함께 식사한 뒤, 사용한 식기는 이틀이 지나도록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그 일도 떠올라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은 식사 후 식기를 바로 씻고 치우셨나요?”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제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나자,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You need to move out.”

집주인도 화가 많이 난 듯, 이 집에서 나가라는 결정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문자가 오히려 반가웠다.


사실 이 집에 이사 온 첫날부터 ‘언제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나가라고 해준다면, 보증금 500유로라도 받고 나갈 수 있으니 더 좋았다.

그래서 곧장 답장을 보냈다.
“I think so. I want to move out.”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다시 문자가 왔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다른 걸 인정합니다. 앞으로 당신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거고, 당신을 존중하겠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태도 변화?
진심으로 나를 내보내려는 건지, 아니면 다시 나를 붙잡으려는 건지 헷갈렸다.

사실은 그녀가 정말 나가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보증금도 받고 깔끔히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문자의 뉘앙스로는 진짜 이사를 원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다시 대화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미 문자로 서로의 감정을 다 쏟아냈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버린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합의한다고 해도, 그녀의 날카로운 기분과 성격에 맞춰가며 살 자신이 없다.


아마 내가 먼저 말을 꺼내면 실수를 할 것 같았고 아직 영어가 서툴러서 내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그녀와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냥 듣기만 하고 구체적인 대응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매우 센 여자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나가게 된다면, 윗집 가족들에게 핀잔을 듣게 될까 봐 그 상황을 피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녀의 진짜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겐 점점 더 이 집이 감정의 전쟁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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