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몰타에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올해 1월 29일에 첫 수업을 시작했으니, 말 그대로 3개월을 꽉 채운 셈이다.
처음 원어민 교사의 수업을 들을 땐 나름 준비를 하고 갔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답답함만이 밀려왔다. 인생 처음으로 원어민의 수업을 직접 들은 그 순간, 말 그대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선생님 메리얀은 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힘든 거 알아요. 하지만 계속 버티면 반드시 나아질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당연히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고, 각오도 했던 일이니까. 그렇게 나는 매 시간마다 온 힘을 다해 수업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 느낀 막막함은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첫 수업에서 느꼈던 그 벽, 그 답답함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수업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담임 선생님이 케빈으로 바뀐 뒤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케빈은 정말 친절한 선생님이었고, 그의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 위해 예습도, 복습도 성실히 했지만 내 듣기 실력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 와서 단 한 마디도 못하던 내가, 이제는 간단한 대화쯤은 가능하게 되었고, 학교 밖에서도 어느 정도 소통이 되니 그건 분명한 변화였다. 다만 수업 시간만 되면, 실력 향상이 체감되지 않아 매번 자책하게 됐다.
하루는 마트에서 계산을 마친 뒤, 직원이 “Copy?”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걸 “커피”로 알아들었다. 순간, 계산대에서 커피를 주는 건가 싶어 잠시 멍해졌다. 나중에야 그 말이 ‘영수증 사본 드릴까요?’였다는 걸 알았다.
이처럼 영어는 책에서 배운 것과 실생활에서 쓰는 것이 완전히 달랐다. 특히 문법 수업은 용어 자체가 영어로 진행되다 보니, 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문법은 몰라도 일상 대화는 가능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하며 수업을 따라갔다.
그런데 오늘, 월요일 아침. 한 주의 시작이기도 하고, 담당 선생님도 바뀌었는데, 도무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더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 정도라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걸까?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이 청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마침 출근 준비를 하던 하우스메이트 아벨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한국 유튜브 그만 보세요.”
그러나 그것을 끝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여기에 와서 하루의 위안을 주는 유일한 즐거움인데. 그렇게 말하자 아벨미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 당신을 4층에서 던져버릴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듣기 실력이 늘지 않으면 이곳에서 영어 공부하는 건 시간 낭비예요.”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왠지 마음속 깊이 찔렸다.
돌이켜보면, 몰타에 온 이후로 말이 안 통할 때마다 얼마나 좌절했던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버텨온 나였는데, 또다시 같은 이유로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잠시 마음 한구석에선 이런 생각도 스쳤다. “그냥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이미 앞으로 9개월치 학비와 집세를 다 지불한 상태다. 남은 기간을 포기한다는 건 말 그대로 ‘전부를 버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헬스장을 등록해 놓고도 몇 번 가다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결국엔 단 하루도 운동하지 않고 기간이 끝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인생의 한 페이지다.
여기까지 와서, 이 많은 비용을 들여서 포기할 순 없다. 그리고 내가 포기하면,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몰타에 처음 와서 외국 생활의 고통을 처음 맛봤을 때,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라고 다짐하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듣기 능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이걸 이유로 물러나기엔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
아직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다시 해보자. 조금 더 노력하고, 조금 더 기다리면 언젠가는 들리겠지. 오늘은 그렇게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설득하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