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콜롬비아인 아벨미가 이번 주 일요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초대를 수락했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 한켠에 걱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학 캠퍼스 기숙사에서 루마니안 슈테판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도 언어의 장벽과 낯선 분위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서 오래 머무는 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아벨미의 파티가 더 부담스럽게 느껴진 이유는, 그의 친구들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생일 당일, 아벨미는 오늘은 일을 쉬기로 했다며 내게 점심을 차려주겠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그런 그에게 점심까지 얻어먹는 게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벨미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서 보관 중이던 한국 소주가 한 병 있다며, 나와 낮부터 함께 마시자고 제안했다. 몰타에서 한국 소주라니! 놀라서 마셔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보기만 했을 뿐 마셔본 적은 없다고 했다.
사실 나도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이곳의 어떤 술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문득 러시아의 보드카와 비슷한 맛과 색깔에 알코올 도수는 낮은 술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벨미는 자신의 생일이라 긴장을 덜고 싶었는지, 점심부터 가볍게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벨미는 미리 생일 파티 장소인 슬리에마의 ‘아이리시펍’으로 먼저 간다고 했다. 나도 조금 뒤에 집을 나섰지만, 약속 시간인 저녁 6시 30분보다 늦을 것 같았다. 구글 지도를 보며 가장 가까운 경로의 120번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몰타는 섬나라라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반대편 버스를 타고 다시 되돌아갔다. 왔다갔다 하는 사이 어느새 오후 7시가 넘었고, 아벨미에게서 “너 지금 어디야? 오늘 파티 올 거야?”라는 문자가 왔다.
곧 목적지에 도착했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상가들 사이로 아이리시 펍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눈여겨본 적 있는 인기 많은 장소였는데, 그곳이 바로 아벨미의 생일 장소였다. 10여 미터 앞에서 보니 아벨미와 친구들 10여 명이 길가의 야외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어떻게 인사를 시작하지?’ 한국어로 하면 자연스러울 텐데 준비도 없이 온 게 살짝 걱정됐다. 하지만 ‘에이,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다가가 “아벨미, 나 왔어. 생일 축하해!”라고 인사하자, 아벨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한국에서 왔고, 몰타대학을 다닌다며 소개해준 아벨미의 표정엔 어딘가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의 친구들을 보니 콜롬비아, 인도, 필리핀, 루마니아, 포르투갈 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었다.
소개 도중, 포르투갈과 필리핀 여자 친구들은 자신들이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며 나에게 호감을 표현해 주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고, 자연스럽게 한국 드라마에 대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필리핀 여자는 과거에 어학원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 쉬운 말로 바꿔주는 배려를 해주어 대화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배려 덕분에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새로운 친구들도 도착했고, 아벨미는 그들을 아일랜드에서 온 친구들이라며 소개해주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자, 그들도 나에 대해 이미 들은 적이 있다며 궁금했었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내가 아벨미에게 김밥을 해준 일화를 친구들에게 전했고, 사진까지 보여줬던 모양이었다.
‘어? 내가 김밥을 만든 것을 이 친구들이 알고 있었다고?’ 갑자기 분위기가 편안해졌고, 대화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외국인을 만나고 대화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더 이상 긴장하거나 위축되지 않았고, 언어의 벽이 여전히 높긴 했지만, 대화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노력 덕분에 소통 자체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2시간쯤 지나 생일 케이크가 등장했다. 친구들이 영어로, 이어서 콜롬비아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벨미가 촛불을 끄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돌아와 생각하니, 나도 한국어로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면 더 인상 깊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노래를 정말 못하긴 한다. 뭐, 그건 다행이려나.
다음 날, 아벨미에게 생일 영상 일부를 보여줬다. 영상 속에서 아벨미는 엉덩이와 몸을 흔들며 친구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기분을 표현했고, 친구들도 이에 맞춰 함께 즐겼다. 매번 느끼지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은 항상 즐겁고 표정에서 찡그림이 없다.
콜롬비아 친구들은 불편한 감정을 타인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타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성향이 형성됐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콜롬비아에서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일. 나중에 아벨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로 했다.
1차 모임이 끝나고, 인근 해변 쪽 골목 상가로 자리를 옮겨 2차를 진행했다. 계단 위 테이블에서 이어진 대화 속, 옆자리에 앉은 콜롬비아 친구 에드가, 타바코, 라미레스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몰타에서 2년 넘게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와의 대화는 어쩐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그들의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들어주는 쪽을 선택했다. 가끔은 그냥 듣기만 해도 좋은 대화가 있기도 하니까.
평소 술을 거의 안 마시는데, 맥주 두 잔에 취기가 올라왔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 아벨미가 테킬라를 시키며 모두 함께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테킬라 마시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손등에 소금을 뿌리고, 레몬을 뿌린 뒤, 테킬라를 원샷하고 레몬에 젖은 소금을 핥아먹는 방식이었다.
처음 마셔본 테킬라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렇게 쎈 술은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한 잔 더!”라고 내가 외쳤고, 친구들은 재미있어하며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 이번엔 내가 스스로 손등에 소금과 레몬을 얹고 자연스럽게 마셨다.
2차가 끝나갈 무렵, 시간이 벌써 새벽 1시. 몇몇 친구들이 돌아가고, 아벨미와 나는 친구 몰티즈 마티아즈가 가져온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건, 마티아즈가 분명 술을 마셨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운전했고, 중간에 급가속, 급정거까지 해가며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몰타는 운전석이 반대편이라 더 무섭게 느껴졌지만, 조용히 참기로 했다. 집 앞에서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술에 취한 아벨미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고, 나는 그를 부축해 집까지 함께 걸어왔다. 키가 185cm가 넘는 아벨미에게 어깨동무는 무리였고, 허리를 잡고 함께 균형을 잡았다.
아벨미의 방 앞에 도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외국인들과 섞여서 대화하고 웃고, 서로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고 나도 이제 조금씩 몰티즈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