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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태양 아래, 동양인의 자리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몰타에서의 생활이 점점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작은 섬나라지만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덕분에,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크게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오늘은 토요일. 점심에 약속이 있었고, 수영장은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운영되기에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태양이 정점에 이르기 전의 오전 시간은 하늘이 맑고 햇살도 따뜻해 수영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수영장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여러 개의 레인이 있어 혼자 수영하기에도 좋았고, 지붕이 없는 야외 구조 덕분에 수영을 하면서 자연스레 선탠도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다만 여전히 동양인이 드문 곳이라, 몰타 현지인들의 시선을 종종 느끼며 조심스럽게 수영을 즐기곤 했다.


특히 주말인 오늘은 평일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평일엔 보이지 않던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와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수영을 배우기보단, 물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온 듯했다. 이곳 수영장은 정식 강습은 없고, 체육 특기생이나 일반 이용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구조다. 드물게 개인 강습을 받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말이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이용객이 급증해 정작 수영할 수 있는 레인을 찾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가족 단위 이용객들이 모여 있는 가장 끝쪽 레인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먼저 수영 중이던 성인 여성에게 레인을 함께 써도 괜찮은지 예의상 물었고, 그녀는 정확한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며칠 전, 혼자 레인을 사용하던 남성에게 같은 방식으로 물었을 땐 "예약됐다(Booked)"고 단호히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해당 레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마음속에 '외국인인 나와 함께 수영하기 싫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불편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수영하는 동안엔 그런 감정마저도 물속에 묻어두었다. 수영복만 입은 상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내가 굳이 따져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길


몰타의 일반 이용객들을 지켜보면, 수영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고, 성인 남녀를 막론하고 수영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한국에서는 수영장에서 누구에게 추월당한 적이 거의 없던 내가, 이곳에서는 매번 추월당하고 있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주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담담해졌다.

심지어 한 번은 여성에게도 추월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 후로는 아예 상대방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양보한 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출발해 재추월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


가볍게 운동을 마친 후, 간단히 샤워를 하고 로비로 나왔다. 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로비에는 가족 단위 고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어 꽤 북적였다. 그들 사이를 둘러보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어 로비 카페로 갔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마키아토를 주문해 봤다. 자동머신 마키아토는 1유로, 수동머신은 1.8유로였지만, 잔돈을 받기 귀찮아 자동머신 커피를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나온 커피는 예전에 마셨던 카푸치노와 맛이 똑같았다. ‘이게 마키아토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직원이 라테로 착각한 것 같았다.

한 모금 들이켜 보았지만, 기대했던 새로운 맛은 느껴지지 않았고 약간 실망스러웠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커피에 특별한 취향이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 차이를 딱히 지적할 정도의 입맛은 아니었다.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커피 값을 내기 위해 5유로 지폐를 건넸고, 여직원은 잔돈을 줄 때 나와 손이 닿지 않도록 손끝으로 동전을 내 손바닥 위에 툭 얹어주었다. 순간, 알 수 없는 거북한 감정이 훅 밀려왔다. 말 한마디 없이 건넨 행동 하나에 "나는 너와 접촉하고 싶지 않아"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짧은 접촉조차 피하려는 듯한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 동양인인 나를 꺼려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런 감정은 말이 아닌 몸짓에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불쾌감은 이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걸어서 20여 분 거리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를 바라보며 오늘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그곳에 조용히 던져놓았다.

그렇게 나의 토요일 오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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