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지난 10여 일간의 크로아티아와 발칸반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이다.
여행 후 첫 수업이라 그런지 마음은 가볍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나는 여전히 수업을 리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에 주말 내내 예습을 준비했다. 하지만 막상 수업에 들어서면, 준비한 문장들은 어김없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적절한 표현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특히 Amira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할 때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에서 자꾸만 벗어나곤 했다.
오늘은 부지런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도 평소보다 10여 분이나 늦었고, 아침부터 날씨는 무척 더웠다. 수업 전 슈퍼에 들러 물과 간식을 사느라 발걸음도 한층 더 느려졌다.
학교 근처 좁은 길을 지나던 중, 중년의 동양인 부부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뒤를 따랐다. 내가 조금 바빠 보였던지,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와이프에게 비켜서라는 손짓을 하는 듯했다.
5개월 넘게 이곳 랭귀지스쿨을 다니다 보니, 이제는 처음 온 학생인지 아닌지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오늘 처음 온 학생들로 보였지만, 수업에 늦을까 봐 그 순간엔 따로 말을 걸지 못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앞 1층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는 사이, 방금 보았던 부부가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혹시나 한국인인지 묻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두 분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와,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내 질문에 부부는 반갑게 "네, 맞아요."라고 답했다. 오늘이 첫날이고, 입학처를 찾고 있는 중이라기에 내가 직접 안내해 드렸다. 학교 직원 Karen에게 인도하고, 나는 곧장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은 평소보다 무난했다. 새로 온 학생들이 3명이 있었고, 두 명은 이탈리아에서 온 고등학생,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한 성직자였다. 아미라 선생님은 첫날인 학생들을 배려해 비교적 쉬운 단어와 주제를 선택했고, 덕분에 이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수업이 끝난 뒤 1층 로비에서 다시 한국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 이름을 주고받고,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묻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이럴 수가, 나와 같은 고향에서 온 것이다.
몰타에 와서 서울이나 대도시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나처럼 작은 지방 도시 출신, 그것도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먼저 고향 얘기를 꺼내자, 두 분도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말이 조금 더 편해지고, 자연스레 점심시간이 다가와 근처 학생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보통 이곳 어학원을 찾는 사람들은 한국의 유학원을 통해 오는데, 이 부부도 지방이라 그런지 타 지역 유학원을 통해 등록했고, 현지 유학원 담당자도 없어 적응에 애를 먹는 듯 보였다.
같은 고향이라는 친밀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오지랖’이 발동했다. 몰타 생활, 교통, 학교 시스템, 유학원 강사들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쉴 새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부부가 그 많은 정보를 아직은 원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천천히, 필요할 때 들려줘도 될 이야기들인데,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서두른 나 자신이 떠올랐다. 남편은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은 했지만, 아내는 내 말보다 나이, 거주 지역, 가족 관계 같은 것들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이 나보다 두 살 많다며 반말과 존대를 섞어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회사 생활에서도 친해지기 전엔 반말을 잘하지 않는다. 요즘 한국의 조직 문화도 나이나 직급보다 관계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녀는 너무 쉽게 반말을 시작했고, 어투도 제법 강했다.
순간, 기분이 조금 상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건, 그녀가 남편보다 성격이 더 직설적이고, 집안의 크고 작은 결정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런 성향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 내가 너무 앞서나간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이 남았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도와주려다 오히려 내가 쉽게 보였던 건 아닌지.
사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줬다면, 그들도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알아갔을 텐데, 나의 조급한 마음에 또 먼저 질러버리고 말았다.
꼭 반말이 ‘쉽게 보였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진중하게 대응했다면, 나 역시 그렇게 가볍게 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늘과는 달리 더 신중하게, 즉답을 피하고 천천히 관계를 맺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만남을, 다시 한번 기대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