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영우가 불편하다.
누군가는 나의 글이 불편할지라도.
평소, 소위 ‘불편러’들을 그리 달갑게 보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늘 불만을 그득그득 쌓아놓는 나를 보는 것 같아서인지, 그럼에도 한 마디도 못하는 나와 다르게 소신있어 보여서인지, 굳이 불편을 전염시키려는 의도가 고까워서인지.
나도 내 속을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불편하다는 말이 오히려 불편했다.
왜, 뭐가 그리 잘나서 툭툭 한 마디씩 던지며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까.
나를 한순간에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이고, 몰지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만 같은, 나를 잡아채 반성의자에 앉히는 그 불편의 말들이 불편했다.
그러나 우영우가 불편하다는 글에 달린 댓글들을 물끄러미 읽다 문득 이해가 됐다.
어쩌면 불편러들 중 누군가는... 모두가 즐거운, 이 흥겨운 분위기에 외따로 있는 이 껄끄러움, 이 껄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나 혼자인 것만 같은 외로움, 그렇게 점차 섬이 되어갈 것만 같은 불안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나 불편해, 그냥 이런 게 불편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아줘, 그래서 조금만 신경 써줘. 그러면 나도 조금 편해질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불편한 너, 너가 이상한 게 아니야.’
이런 말들을 그냥 무작정 하고 싶지 않았을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고쳐쓰는 지금에도 여전히 나의 불편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나의 불편은 한 편 나와 닮은 누군가를 조금 편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부족한 글로 내가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우영우가 불편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고 당신 혼자만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영우가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당신이 몰지각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단지 세상에는 우영우 이야기가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히 모나거나 삐딱한 건 아닌데다, 그저, 함께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다룬 콘텐츠는 종종 우리를 찾아온다.
우영우 이전에는 굿닥터의 박시온이 있었고, 그것만이 내 세상의 진태가 있었다.
기억 저편을 더듬어보면 말아톤의 윤초원이 있었고 해외에서도 레인맨이 있었다.
잘 소화하면 작가는 시나리오로, 감독은 연출로, 배우는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시청자는 장애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되고. 마음은 따뜻해지니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다. 딱히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굳이 삐딱한 불편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실토하자면 나는 말아톤도, 굿닥터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유독 이제야 우영우가 불편한 이유는 굿닥터와 우영우가 달라서가 아니라, 내가 대단히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굿닥터가 방영했을 때의 나와 우영우가 방영하는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되는 현재, 우리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의심으로 치료 중이다. 아이가 내가 세상을 보는 필터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생활반경이 다른 탓에 일상생활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예전에는 자폐면 자폐였는데 어쩌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중 굿닥터의 박시온이나 우영우와 같은 고기능 자폐는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 대부분은 지적 장애를 동반한다. 우리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 판정하기 어려운데도, 가끔씩 포털 뉴스에서 발달 장애인의 가족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면 며칠씩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기사 댓글에는 가족들의 호소가 가득했다. 영원히 아이에 머물러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과 생존이 달린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등장하는 콘텐츠는 늘 비슷한 양상을 띤다. 주인공은 평범하지 않은 말투, 눈짓, 행동거지, 사회성을 가지고 있어 문제를 일으키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그리고 일상생활도 어느 정도는,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귀엽게, 어찌됐건 해낸다.
미디어를 통해 선보이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사례들이 이처럼 대부분 비슷하게 그려지다 보니 어떤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것 같다. 자폐인은, 어딘가 비장애인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다는... 혹은, 뛰어난 부분이 있어야 그래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하다 못해 의외로 행동거지가 귀엽게 보이기라도 한다는... 그런 인식.
그렇다고해서 우영우가 장애를 가볍게 다루거나 희화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비슷하게 그려지고, 비슷한 반응을 거쳐 고착화되는 과정이 많이 씁쓸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가장 큰 어려움은 평범하지 않은 말투와 몸짓이 아닌, 의사소통과 일상생활이 원만히 되지 않는 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다수는 필연적으로, 배려를 넘어선 보살핌이 필요해진다.
그런 면에서 직업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하는 우영우는 드라마 시작부터 이미 골에 도달한 것과 다름이 없어보였다. 정작 우영우가 변호사가 되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그 뛰어난 암기력은 우영우 본인의 노력과 주변인의 배려로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우영우가 가진 장애로 겪는 트러블은 사실 '아이가 내가 없어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비하면 적어도, 사견으로는, 해프닝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 주변인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스펙트럼이라는 표현을 따라 삶의 형태 역시 넓게 펼쳐져 있다. 그러니 모두가 나처럼 우영우를 불편하게 바라보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히려 나의 글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가족은 불행하다는 전제하에 쓴 것만 같아 역으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분명히 말하자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불행하거나 힘들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며 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영우를 비롯한 콘텐츠가 이를 조금씩은 왜곡하고 있다는 게 내 솔직한 감상이다.
내가 아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을 때 지인 중 한 사람은 ‘그럼 서번트 같은 거 아니야? 막 다 외우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지인이 나에게 악의를 가져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무심함을 계속 곱씹게 되는 내가 못나고 미워 한 동안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같은 일을 몇번 더 겪는들 내가 훌훌 흘려보낼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걱정스러웠다. 우영우를 보고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어설피 알게 되고 기대할까봐. 나는 믿기 어려웠다. 우영우를 보고 자폐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섣부른 단정을. 나는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우영우를 보고 쉽게 나(누구)도 자폐 증상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영우가 불편했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한데 섞어놓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그렇게 배려심있게 돌아가지 않는다.
외모의 매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직업이 없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이나, 지적 능력이 다소 부족한 사람이나, 어쨌든 역경을 가진 사람은 늘 이야깃거리의 대상이었다. '안녕하시렵니까'로 유명한 신동엽의 레일맨, 맹구와 영구 등 지적 능력이 부족한 캐릭터들, 웰컴투동막골, 맨발의 기봉이, 7번 방의 선물이 흥행할 때 웃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잠깐씩 들러 울고 웃다 떠난 그 일상을 계속 이어 살아가야 하니까.
단지 나는 아이 덕분에 그런 일상이 보이는 세상에 조금 일찍 들어서버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보다 더 우월할 것도 더 대단할 것도 없지만, 오히려 더 불편할 것도 많고 못 보게 된 것들도 많지만, 그래도 같은 위치에 선 사람들을 한 번씩은 생각하게 되는 그런 세상에.
더 생각해보면 세상은 그렇게 나쁘게만 돌아가지도 않는다.
우영우로 인해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많은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희망을 느끼게 되는 지점도 있다. 그리고 분명히 다음에는 더 나은 시선과 시도가 있을 것이다.
나처럼 우영우가 불편했던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로 글을 마치려 한다.
세상의 모양은 그대로 있는데 이리저리 비추는 조명에 따라 빙글빙글 돌던 그림자가 마침 내게 드리워진 것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림자에 가려진 것이 나 혼자도 아니고, 그림자에 가려졌다고 해도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림자에 가려진 우리를 못본다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면 된다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야 한다고. 어쩌면 내게 드리워진 것이 그림자가 아니라 까만 빛일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