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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14. 2024

문학의 패배, 하지만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오에 겐자부로)

내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다. 쌍둥이 출산은 보통의 경우보다 위험하다고 한다. 수술실에서 마취된 채 배를 가르고 있는 아내를 기다리며 장인어른, 장모님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무사히 태어났고 그 순간 의술을 왜 인술(仁術)이라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태아, 산모 모두 무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수술진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연방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마 내가 살면서 가장 진심으로 전한 말과 행동이었던 것 같다. 장모님께서는 이 일의 경험자답게 다음에 필요한 일을 초연한 모습으로 준비하셨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을 닦음과 동시에 애들 손가락 개수가 다섯 개가 맞는지를 걱정했다. 그 짧은 순간에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명확하게 기억난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은 이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에 대해 알게 해 준다.


'버드'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의 아이는 뇌헤르니아(머리에 외상을 입어 뇌의 일부가 두개강 밖으로 빠져나온 상태)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버드는 아기의 수술 여부를 고민하다 결국 수술을 포기하기로 하고 '결정적인 일(아기의 죽음)'을 기다린다. 버드는 아이를 기르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끝날 것이라 여기면서도 아기를 간접적으로 죽이는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사실 어젯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의 경험을 쓴 의사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오늘은 막연하게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라든가 아폴리네르의 시를 통해 주인공의 고뇌를 다뤄볼 생각이었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가짜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분의 글 속에는 진짜 아기들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었다. 읽는 내내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실된 울림을 경험했다. 책 속 버드의 아기와 같은 일을 직접 겪고 계셨고 그로 인한 의사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 따위가 소설책 한 권 읽고 감히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위대한 진실 앞에 문학이 이렇게 초라해질 수도 있다는 걸 느끼자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좋은 의미로 압도적인 무언가에 처참하게 밟혀 버린 기분이다. 


어설픈 감상문 대신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우리 아이들은 쌍둥이라 한 명이 아프면 따라서 같이 아프거나 한 명이 나으면 다른 한 명이 뒤늦게 아픈 식으로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병원은 자주 간다. 내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한 탓에 아이들은 병원에서 진료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께 인사를 잘 안 한다. 그럴 때마다 애들 머리를 잡고 억지로 허리를 굽히는데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애들 핑계를 댔지만 사실 나도 똑같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한마디 더 할 뿐이다. 뭐가 감사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학습됐으니까 기계적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을 뱉을 뿐이다. 아이들과 병원을 그렇게 다녔지만 감사함을 진심으로 전한 적이 없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고마워할 줄 아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나를 비롯해 우리 아이들은 기억해 내야 한다. 너희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를. 너희들이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주신 그분들께 온 마음을 담아 감사함을 전해야 한다. 설령 그분들이 아니라 해도 다음부터는 꼭 같이 말씀드리고 오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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