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이로 늙는 게 아니다
노인과 바다(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를 처음 읽었을 때는 노인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끈기, 강인한 삶의 의지 등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투쟁심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젊은 독자는 누구나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지만 20살 때에 비하면 확실히 늙었다. 투쟁심과는 거리가 아주 먼,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말을 이제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의 실수에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었으며 친구와 만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몸이 예전만큼 활기차지 않고 그리고 외롭다고 느껴지는 때가 많아졌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끔씩 사람이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노인이 오랫동안 고기를 못 잡다가 큰 물고기랑 사투를 벌여 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상어 떼에게 고기를 다 뜯기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끝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의 내가 물고기나 상어 떼와 벌이는 사투의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지금의 나는 노인의 늙음과 외로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특히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소년의 존재에도 관심이 생겼다.
우리는 누구나 늙는다. 어느 누구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인의 늙음은 일반적인 노화와는 구별된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늙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눈이다. 그의 신체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처럼 늙었으나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고 있다고 묘사된다. 쇠락한 육체와 달리 아직도 젊고 맑은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과 나눈 대화에서 "늙은이는 왜 그렇게 일찍 잠에서 깨는 걸까? 하루를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일까?"라며 소년의 자명종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것이 그의 늙음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가 고기와 사흘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손에 쥐가 나고 상처가 생겨도 절대 낚싯대를 놓지 않는다. 상어 떼와 싸울 때도 작살이 없다면 몽둥이로, 그마저도 없다면 키 손잡이를 뽑아서 싸운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라는 세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닮아 있다. 삶은 언제나 힘겨우며 때로는 운이 매우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인과 마찬가지로 삶의 낚싯대를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운명이기 때문인가?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은 말 상대인 소년을 보며 반가움을 느낀다. 그 동안은 바다에게 홀로 말을 건냈을 뿐이다. 바닷새도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하는 고기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바다에서의 삶을 공유하려고 하기도 했다. 노인은 항상 사자 꿈을 꾸지만 노인과 달리 사자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나타난다. 소년을 사랑하듯 사자들을 사랑했다. 다시 돌아가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찾자면, 어쩌면 유일하게 나를 기다리고 인정해주는 소년과 함께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음에 대한 궁극의 답은 아니지만 계속 답을 추가해 나가면 된다. 세상에는 책이 한 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유치하고 수준 떨어지는 감상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인정해야 한다. 텍스트를 기반으로 쓸 수 있는 내용은 내 수준에서는 이게 전부다. 더 현학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쟁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노인의 꿈 속 사자는 종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책 뒤에 붙은 해설을 참고해 작성하면 된다. 하지만 스스로 진짜 노인이 되는 길을 택하고 싶지는 않다. 내 눈은 아직 바다 빛깔로 가득찰 수 있을만큼 충분히 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