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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21. 2024

옛날에는 펭귄이 날 수 있었다?

낙원(압둘라자크 구르나)

6월 초에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 다녀왔다. 집에 아이들이 이제는 어디 가보고 싶다고 자기들이 주말 계획을 세워 나를 운전대 앞으로 밀어 넣기에 달리 거부할 방법이 없다. 생태원 건물로 들어가기 전 식물들이 죽 늘어선 입구 쪽에서 어떤 어르신이 자신이 대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하려는 듯 당당하게 노상방뇨를 하시길래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여러 테마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극지관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펭귄이 예전에는 날 수 있었다! 환경에 맞게 진화한 탓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 대신 물에서 헤엄치는 지느러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낭만적인 사실에 들떠 하늘을 나는 뽀로로와 펭수를 생각하며 사진을 하나 남겨 왔다.

날아라 펭귄!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바로 구입했지만 몇 년 동안 읽다 말다를 반복하며 완독 못했던 책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아랍 문화권이나 동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탓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다른 작품은 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무면허 문학 열차의 기관사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금 비유는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브런치 북 이름을 이걸로 수정했다.)


'유수프'는 어린 시절 '아지즈'라는 상인에게 빚을 진 아버지 때문에 아지즈를 따라나선다. 일종의 볼모인 셈이다. 아지즈의 가게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칼릴'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고 어느덧 청년이 된 유수프는 칼릴의 이복 여동생을 좋아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인 아지즈의 또 다른 여자였지만 그녀와 함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마을을 습격하고 숨어 있던 유수프는 자신의 비겁과 마주하게 된다.


길게 작품을 소개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에 필요한 부분만 요약했다. 무면허인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자면 성장소설로서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수프가 아지즈를 따라나선 기차에서 엄마가 준 묵주를 잃어버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홀로서기에 초점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점은 슬픈 운명을 가진 인간의 성장을 다루고 있음에도 감정의 흘러넘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절제는 이 소설이 읽기 힘든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한다. 마치 문화인류학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랄까. 나약했던 유수프는 차츰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작품의 결말은 이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진화와 사회화는 환경에 적응해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성장은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사회학에서 다루는 사회화에 가깝다. 유수프라는 주인공의 사회화, 즉 성장은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개가 똥을 먹는 것을 보며 자신의 비겁을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와 닮아 있다. 똥을 많이 먹느냐 적게 먹느냐 혹은 보이게 먹느냐 몰래 먹느냐하는 걸로 싸움을 벌일 뿐 결국 모두 똥 먹는 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로는 현실 앞에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피곤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진실로부터 숨는다. 정말 서글픈 일이다. 자신을 속이고 남들 눈치를 보며 발 빠르게 세상에 녹아드는 것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화'한 사람들은 정말 많다. 이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깟 진화쯤이야 뭐가 대수랴. 서정주 시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자화상'을 발표했을 당시만큼은 맑은 영혼을 가졌던 것으로 믿기에 시를 인용한다.

<전략>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중에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를 외치던 시인의 진화 결과는 참담하다. 일제 강점기에 문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송정오장 송가>는 그 범위를 초과했다. '마쓰이 히데오!' 하고 부르짖는 이 시는 가미카제 특공대였던 조선인 청년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한다. 시인의 날개 대신 지느러미를 선택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무면허인 내 생각에는 현대시사에서 서정주를 빼면 무엇이 남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시인들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서정주는 그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가 망쳐버렸다.


난 세상에 대한 발 빠른 진화를 거부한다. 많은 것이 변했고 지금도 쉬지 않고 변하는 중이다. 이런 가치관은 스스로를 낙오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느린 대신 언제나 진심이었고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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