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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03. 2024

선(線), 조금은 벗어나도 괜찮아

항로 이탈

누구에게나 선(線)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벗어나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애초에 오려야할 선이 아주 굵어 벗어날 위험이 적거나 수 많은 종이를 가지고 있어 다시 오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그 선을 벗어난다면 크나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


물론 나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좋아하는 캐릭터 그림을 완벽하게 오리는 것에 실패해 울고 있는 어린 딸을 보면 얼굴은 미소 짓지만 마음 한편은 시큰시큰하다.


우리집 아이들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도 플레이 버튼을 누르지 않은 정체 모를 노래의 무한 반복을 억지로 듣던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핑킹가위입니다'라는 가사가 들렸다.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뜬금 없는 가사에 '요즘 아이들은 상당히 전위적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구나'하고 속으로 녀석들의 심오한 음악 세계를 조롱했다.


한 동안 노래는 계속되었고 두통에 시달리다 못해 '조용히 하고 장난감 좀 치워라.'라는 생각을 소리로 뱉어내려던 찰나 녀석들이 신나게 오려낸 종이의 참혹한 시체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핑킹가위의 가윗날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은 어느덧 물결무늬 가윗날을 따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변화가 필요해.'


종이를 가위로 오리지 않고 손으로 아무렇게나 북북 찢어내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날이 잘드는 가윗날로 오려낸 것처럼 '정확하고 올바르게, 어긋남이 없이 살아야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아왔다. 교사 흉내를 간신히 낼 수 있을 만큼의 경력에 접어들지만 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나의 모든 실수가 스스로를 괴롭혔고 오차 없는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다.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도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고 충분히 어리석다. 애초에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만한 위인 따위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유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줄곧 그래왔으니 얼추 20년 정도 된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원인 모를 불안과 우울함에 몸부림쳤다.


신체적으로 어디가 심각하게 아프지도 않았고 하는 일이 심각하게 꼬여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태도 아니었으며 대인관계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마음 속에 곧은 선이 하나 있었다. '정확하게 선을 오릴 생각은 집어치워라. 본 지휘자는 지금부터 지그재그 변주를 허용하노라.' 선장에게서 항로를 살짝 이탈해도 좋다는 항해 명령이 떨어졌다. 핑킹가위로 오려낸 만큼의 오차라면 눈감아 주겠지만 선을 크게 벗어난다면 엄격한 선장을 불안하게 할 것이므로 최소한의 일렁임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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