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매년 학교생활기록부를 작성한다. 담임교사의 경우 한 학생당 자율활동 특기사항 500자, 진로활동 특기사항 700자,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500자, 경우에 따라 개인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500자 내에서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기록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분량을 다 채운다. 한 반에 25명이라고 가정하면 개세특을 제외해도 1700X25, 약 42,500자 정도를 기록하게 된다. 여기에다가 담당하는 동아리 학생들의 특기사항(500자), 그리고 요즘 입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500자)을 수업하는 반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기록한다면 10만 자는 우습게 넘어간다.
교육과정의 변화와 고교학점제의 도입으로 예전처럼 한 과목만 담당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최소 두 과목에서 많게는 네 과목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포함한 생활기록부 작성은 팔만대장경 조판에 가깝다. 이 일을 10년 넘게 해 왔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걸 즐기는 편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 의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의미 있고 신성한 일이다. 본말이 전도되어 생활기록부는 대입을 위한 자료로써의 가치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대다.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내가 아이들을 1년 동안 지켜보고 그동안 본인들이 이뤄낸 성과를 공유하여 자신의 미래를 착실히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대입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의 충족과 교육이라는 본질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쓴다.
이 틀에 박힌 글쓰기를 보상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공적인 대입 결과로 감사를 전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입시 컨설턴트에게서 '2학년 때 생활기록부 내용이 너무 알차고 좋다.'는 말을 듣고 내게 감사함과 동시에 그들의 칭찬을 대신 전한다. 대견하고 뿌듯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반면에 흔치 않은 경우지만 어떤 학생들은 자신을 지켜보고 기록을 남겨 준다는 것 자체에 감동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평생 교사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웃기게도 남의 이야기는 그렇게 열심히 쓰면서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써 본 적이 없다. 그 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안 하려고 했다. 괜히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서 마음만 어지러워질 것 같았고 지금 기억해 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곧은 선의 정체를 밝혀낼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즐겁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기 시작한 거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오랜 기간 부정하며 방치했고 약물 치료를 시작한 지는 1년 반 정도 되었다. 마음의 병을 인정할 수 없었고 나약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평생을 고통스러워했다.
교술 갈래, 그러니까 에세이는 '자아의 세계화' 과정이라고 한다. 나를 바깥으로 꺼내려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제 그동안 억지로 외면했던 문제들을 돌아볼 생각이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고 아직도 우리 엄마는 그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시지만 이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다 쓰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으로 빠져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은 담담히 써 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