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지도에도 없을 것 같은 시골에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엄마랑 아빠랑 두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였다. 엄마는 몸이 약해서 모유 수유가 어려웠다. 80년대긴 하지만 애들이 뜨신 물에 가루만 타서 먹고 큰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신기해하셨다고 한다.
한번은 엄마가 농사일을 하다 벌에 눈을 쏘인 적이 있었다. 그때 엠뷸런스가 와서 엄마를 싣고 시내로 나갔다. 난 엄마가 죽는 줄 알았지만 벌독알레르기로 생긴 흉터를 없애기 위한 쌍꺼풀 수술을 하고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80년대에 그 시골에서 쌍꺼풀 수술을 한 사람은 아마 우리 엄마밖에 없을 거다. 그 후 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에게서 독립해 시내로 나와 살았다. '대창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이름대로 크게 번창하지는 못하고 파리만 날렸던 걸로 기억한다.
아빠의 다음 사업은 우유 도매업이었고 그때는 나름 괜찮았던 거 같다. 단칸방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연탄가스를 마셔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방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남들처럼 수학이나 피아노 학원 따위를 다니며 안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은 불시에 찾아왔다. 술을 좋아하던 아빠는 간암을 선고받았고 엄마는 아빠의 항암 치료를 위해 우리를 큰 이모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부모님의 고생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좀 불편했을 뿐이다. 핑계를 대자면 그런 문제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신경 쓸 만큼의 나이가 아니었다.
이모네 집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낸 걸로 기억하지만 며칠 전 엄마에게 확인한 결과 그 기간은 1년도 채 안 된다고 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졸업 이전까지 이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엄마 말에 의하면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 시기는 누가 지워버린 것처럼 기억이 잘 안 난다. 내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엄마는 아빠의 마지막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셨다는 것과 아빠의 죽음을 동생 몰래 내게 전할 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는 것 말고는 없다.
묵형(墨刑)은 죄인의 이마나 팔뚝에 먹물을 새기던 형벌이다. 우리 엄마는 엄마라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그런 집에서 태어난 여자는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중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 처음 보는 남자와 선을 보고 결혼해 24살에 나를 낳았고 2년 뒤 내 동생을 낳았다. 엄마는 배운 건 없었지만 항상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누구보다 정직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하늘에게서 묵형을 선고받고 평생을 얼굴에 그림자를 끼고 살아야만 했다.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와 동생이 잠들면 엄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큰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써 끅끅거리는 숨소리까지 하나하나 그대로 기억한다. 나도 이불속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몰래 울었다. 다음 날이 되면 서로 모른 척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살았다.
처음에는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게 뭔지 몰랐다. 오히려 부쩍 늘어난 자유에 내심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생활'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 없이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건 상상 이상으로 가혹한 일이었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지금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38살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가 98년 봄이니까 IMF 한파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였다.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과 그가 벌여놓은 사업 수습을 하지 못해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사기까지 당했다. 으레 그렇듯 가까운 사람들부터 우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때 빚이 2억 조금 안 됐다고 한다. 1998년에 말이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책임지기 위해 작은 분식집이나 식당을 했지만 음식 맛이 없었으므로 결과는 뻔했다. 다음에는 식당 설거지, 보험 외판원, 노인요양보호사 등 여러 직업을 갖게 되었다. 중간에 내가 모르는 뭔가를 더 하셨을 수도 있다. 그 덕분에 우리 남매는 엄마의 바람대로 직업을 그리 자주 바꾸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 기억을 살리기 위해 엄마에게 이것저것 여쭤보니 그런 걸 왜 묻냐고 펄쩍 뛰신다. 내 성격이 밝지 못한 게 당신 잘못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때 너희들한테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사느라 그러지 못했다. 니가 가끔씩 부정적인 생각할 때마다 모두 나 때문인 거 같아서 아직도 속상해 죽겠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냥 아빠 돌아가셨을 때가 지금 내 나이 같아서 그런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지낸다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굳이 이런 어두운 얘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 얘기로 대박을 친 소설가를 "엄마 팔아서 글 쓰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던 사람의 말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문학적 소양'이 출중하신 분이었다.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인 지표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이었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 소설가도 위로받고 싶어서 쓴 거 아닐까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쓰지 않았을까요?'라고 정중하게 대들어 보고 싶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