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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03. 2024

손(手), 신사적으로 화해하는 방법

선을 손으로

일탈을 싫어하는 나는 글의 내용과 형식과 표현은 목적이나 주제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일렁임으로 시작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내 글의 목적에 의한다면 최소대립쌍이라는 개념을 반드시 가져와야한다.


음운은 말의 뜻을 구별해 주는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단 하나의 음운이 달라 의미가 변별되는 단어들의 쌍을 최소대립쌍이라고 한다. '선'에서 모음 'ㅓ'를 'ㅗ'로 바꾸면 '손'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다. 즉 '선'과 '손'은 최소대립쌍이다. 앞서 최소한의 항로 이탈에 대해서는 이미 승인 받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무리 예민한 선장이라도 용서할 수밖에 없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마음에 자리잡은 지독한 선을 손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적과 싸우려면 대상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선을 그리는 일이란 글을 쓰는 일이다. 이 소름끼치는 선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평생을 독자로 살아왔다. 눈은 글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지만 손은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 나아가 남에게 글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에 대해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평소의 삶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들지만 나쁘지 않다.


'솔직해지자. 평생 제대로 된 일기한 번 안써본 주제에 어설프게 멋부리고 억지로 꾸며봤자 남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야. 그냥 인정해.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이제와서 꿈틀거려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편하게 살아. 괜히 나만 고생시키지 말고.'


손이란 놈에게 입이 있다면 저렇게 말했을 거다. 인정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위대한 문장들로 쓰인 수 많은 명작을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텐데 하찮은 놈이 징징거리는 거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 손은 부끄러움이 많았고 게을렀다. 피아노 학원에서 같은  여학생을 만났다. 90년대 중반은 '남녀유별'의 시대였지만 피아노 학원이 워낙 유행인지라 남학생들도 많이 다닐 때였다. 그 친구는 반가워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 친구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차츰 피아노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당시 한 달 학원비였던 거금 5만원을 꿀꺽해버렸다. 학원비 봉투에 현금을 담아 학원비를 내던 때라 계좌 이체니 카드 결제니 하는 증거도 없었다. 학원을 간다고하고 집에서 나와 학교 앞에 늘어선 문방구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자 애들 사이에선 미니카가 선풍적으로 유행하던 때라 최고급 미니카에 골드모터니 블랙모터니하는 엔진들과 무지개 바퀴니 더듬이니 하는 장식품들로 사치를 부렸다. 아마 그 때 친구들은 우리집이 엄청 부자인 줄 알았을 거다.


어린 무법자는 이 사치와 향락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어른들은 모든 걸 다 안다. 특히나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엄마한테 플라스틱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나서야 내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 다시 피아노 학원에 끌려갔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두게 되었다. 마침 게을러빠진 내 손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멋지게 놈을 몰아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 너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렀으니 이번엔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움직여라. 앞으로는 내 마음을 충실하게 옮기는 일을 좀 해줘야겠어. 너의 지난 잘못을 명예롭게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


방금 본 것처럼 어떠한 강요나 겁박 없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내 손은 아름다게 화해했다. 평생을 편하게 지냈으면 이제부터는 좀 바빠져도 할 말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잘 해 보자구.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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