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마음지도>10
째째의 목이 입구 쪽을 향해 길어졌다.
째째의 엄마가 째째에게 온다.
엄마는 딸의 휴무일에 맞춰 마산역에 도착한다는 편지를 째째에게 띄웠다.
엄마가 온다는 편지를 받은 뒤 째째의 그리움은 도리어 다급해졌다. 하루는 길어져 이틀이 되고 급기야 일 년이 되었다.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엄마가 오는 날.
째째는 몇 시간 전부터 마산역에 나와 엄마를 기다렸다. 오늘은 휴무일, 기숙사에서 일찍 외출증을 끊고 엄마와 하룻밤을 보낼 외박증도 끊었다.
드디어 엄마가 보인다. 인파 속에서도 째째는 단번에 엄마를 알아봤다. 말라서 큰 키가 더 커 보이는 엄마의 머리 위에 보따리가 얹혀있다.
“엄마!”
“엄마!!”
엄마도 더듬이지 않고 딸을 알아봤다.
“우리 딸!”
왈칵 눈물 바람. 참으려는 마음을 비집고 흐르는 엄마의 눈물, 터진 둑처럼 마구잡이로 흘러내리는 째째의 눈물.
“엄마. 엄마.”
“에구, 내 새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째째와 엄마는 기숙사 가까운 곳에 여관방을 잡았다.
“이게 뭐야?”
“떡. 네 방 식구들과 나눠 먹을 떡.”
기숙사에서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는데, 이는 '가족 면회를 나간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였다.
가족을 만나 하룻밤을 지낸 한 방 사람이 돌아올 때면 그들 손에는 어김없이 함께 나눠 먹을 떡이며, 과자 같은 팔도의 먹거리들이 들려 들어왔다.
그날은 방 파티가 벌어졌다. 가져온 음식들에 더해 각출해서 산 콜라 같은 음료들이 곁들여졌다. 당연히 방 식구 중 면회자가 있는 날이면 모두가 기대감에 들떴다.
“이건 도시락.”
엄마는 딸과 함께 먹을 도시락도 싸 왔다. 도시락 안에는 째째가 좋아하는 나물들이 가득했다.
“우리 제제, 찰밥 좋아하지?”
명절이 되어야 먹어볼 수 있었던 흰 찰밥이 도시락 안에 가득했다.
“찰밥이다!”
“어서 먹어.”
“엄마도.”
“그래. 어서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엄마는 함께 싸 온 숟가락은 들었지만 째째가 반을 먹도록 밥을 뜨지 않았다.
어릴 적 일제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공부하면서 한결같이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인물은 유관순 열사.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의 몸으로 당했던 가혹한 고문들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이길 수 있지?'
'어떻게 살을 찢기고, 손톱이 뽑히는 아픔을 참을 수 있지?'
'나는 주사 맞는 것도 무서운데.'
'선생님께 맞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내게는 주사가 무서워서, 주사를 피해 도망 다녔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 필수 예방접종은 학교에서 단체로 맞았다. 보건소에서 나온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교실 앞 탁자에 자리를 잡으면, 우리들은 번호대로 줄을 서서 맞아야 했다.
나는 주사 맞는 것이 무서웠다. 죽을 것처럼 두려웠다. 도망쳤다. 그러면 선생님은 나를 잡으러 달려 나왔다. 선생님은 나를 잡기 위해 달리고, 나는 그 선생님을 피해 달렸다.
결과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나중의 상황.
그런데, 유관순 언니는 혹독한 고문을 견뎠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죽으면서도 의지를 꺽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의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분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그 아픔을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궁금했고, 닮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그런 마음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다니던 3년 시간을 견디게 한 건 아니었는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정문 오른쪽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어떠한 시련과 곤궁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소녀 이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소망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가해지는 고통의 물리적이고 사실적인 현상과 달리, 받아들이는 고통의 질량과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지금에도.
뼈에 못을 박는 듯한 충격파 치료를 정형외과에서 받으면서 고통을 냉정하게 쳐다보려 안간힘을 쓴다. 얼굴은 절로 찌푸려지고, 마음은 ‘어서 끝나라’ 간절해지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고통을 바라보려 애를 쓴다.
그래야 자유로우니까. 육체를 담보로 가하는, 혹시 있을지 모를 불의 앞에, 유관순 열사처럼 당당해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