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마음지도>9
째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태어나 처음 엄마랑 떨어져 산 지 한 달.
퇴근해 누운 잠자리. 열두 명이 겨우 몸만 뒤척일 정도로 붙어 누운 잠자리 가운데에서 소리 죽여 운다. 열여섯 살 째째가 운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아.'
째째의 가슴은 찌르르, 짓누르는 슬픔에 짓무른다. 왜 그리움은 가슴으로 오는지 모르겠다. 엄마 곁을 떠난 뒤부터 째째의 가슴은 그리움으로 검퍼렇게 짓물렸다. 퍼렇게 짓무른 가슴에서 검푸른 물은 뚝뚝, 온몸을 적신다. 일어나 공장을 갈 때도 뚝뚝, 공장 기계 앞에서도 뚝뚝, 공장에서 돌아와 세탁실에 갈 때도 뚝뚝, 밥 먹을 때도 뚝뚝, 옷 갈아입고 학교에 갈 때도 뚝뚝.
흘러내린 남색 물은 째째가 바라보는 거리를 물들이고, 양재동을 물들이고, 마산을 물들이고, 대한민국을 물들이고, 지구를 물들였다.
“흑……흐흑…….”
째째의 울음은 곧 한 방 친구들의 울음. 울음은 이리저리 흘러가며 기숙사를 점령한다. 품고 있는 슬픔이 샛강이 되어 이리저리 흐르다가 강이 되어 넘실댄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리움, 세상의 전부인 엄마를 향한 그리움.
“언니, 엄마 보고 싶은 거 언제 없어져요?”
“언니, 얼마나 지나면 이 죽을 것 같은 엄마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요?”
“언니, 언니는 안 그랬어요? 얼마나 그랬어요?”
“언니, 얼마만큼 참으면 돼요? 그러면 견뎌져요?”
공장에서, 먼저 엄마를 떠나 온 나이 많은 언니들에게 째째는 묻고 또 물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째째는 물었고, 물으며 울었다.
그 시간 동안 째째에게 꿈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째째를 지배하는 마음은 '대자유'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세상을 알고 싶은 꿈이 아니라, 오직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았다.
8시간의 노동, 자주 있는 한 시간여의 잔업, 하루 세 번의 식사 시간. 그리고 4시간의 학교 공부.
그리움은, 처음 해보는 노동에서 오는 고됨을 무력화시키며 째째를 지배했다.
“그래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은 거야. 그래도 이겨내야지. 학교 다녀야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지.”
학교는 어린 여공들에게 고통을 견디게 하는 방파제였다.
그래도 째째의 마음은 소리 질렀다.
'못하겠어! 더는 못 참겠어…….'
'엄마! 엄마.'
'어떻게 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엄마!'
하루, 또 하루, 다시 하루.
십여 년 전, 낯선 연락을 받았다.
“저는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한 00입니다. 혹 00회 졸업생 00 아니십니까?”
잊을 수 없는 시간, 잊을 수 없는 이름.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반가움이 왈칵.
“맞아요.”
동창회를 알리고 함께 하자는 연락이었다. 고마웠다. 반가웠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 함께 일을 했던 언니 동생들, 기숙사 한 방에서 함께 먹고 잤던 사람들이 올올이 되살아나 그리워졌다.
나와 한 학년을 다녔던 친구들은 2천여 명, 40반이었다. '제노바'를 만든 일터에서 함께 일한 동무들은 대략 수십 명.
내가 다닌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1974년 1월 한일합섬이 세운 대한민국 최초 실업계고등학교였다. 한일합섬은 70년대 한국의 섬유산업의 주축을 이룰 만큼 거대 기업이었고, 당연히 이 기업을 움직이게 할 인력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니 한일합섬이 여자고등학교 설립한 건 경영자의 입장에서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들은 안정적으로 수급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은 보장된 기간이었고, 이 기간 동안 여공들의 숙련도는 안정적으로 쌓여나갔을 것이니.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했던 70년대,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여자아이들에게 고등학교 진학은 쉽지 않았다. 당연히 한일여실고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폭발적이었다.
마산이 있는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서울, 제주도까지 배우겠다는 의지 하나로 중학교를 졸업한 열일곱 살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원서를 냈고, 시험을 치렀으며, 체력검사를 받았다.
“몸무게를 잴 때 주머니에 몰래 돌을 넣었었어. 뭐 먹을 게 있었나, 다들 빼빼 말라 있었지. 그때 몸무게 커트라인이…….”
우리는 몸무게를 늘리려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고, 까치발을 들어 키를 높이는 노력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대안은 먼저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이후 다시 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이때는 공장에서 일한 1년에 대한 가산점이 주어졌다.
나와 함께 전주에서 시험을 치렀던 은진이도 떨어져 회사에 먼저 입사했다. 이렇게 1년을 일한 뒤 학교에 입학했다.
동창회 덕분에 보고 싶은 몇 친구들과 연락도 되었다.
동창회 모임에도 참석했다.
친구들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고통마저 곱게 물들이는 추억의 힘은 친구들의 그때 그 시간도 물들였을까?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졸았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나. 걸으면서도 졸고, 밥 먹다가도 졸고. 공부하면서도 졸고. 일하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 손가락이 기계에 들어갔잖아.”
“맞아. 야간작업을 하고 오전에 학교 가면 교실 전체가 전멸이었어. 엎드려 자느라고. 호호.”
여기저기 동조하는 소리, 웃음소리.
어쨌든, 겪어낸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다. 그 시간에 웃음 지을 수 있다는 건 그때의 시간이 거름이 되고 살이 되었다는 의미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