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마음지도>37
째째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명상을 한다.
글을 쓴다.
생각한다.
째째는 어제까지의 삶의 길을 보기 위해 일기장 파일을 열었다. 일기장을 태운 이후 쓴 글들. 종이 위에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컴퓨터 아래아 파일에 담긴 일기. 일기는 대체로 아포리즘적이다. 반복되는 실수와 습관으로 한 행동에 대한 반성, 고통을 적은 글들. 무수한 다짐들. 지리한 마음을 뚫고 새싹처럼, 혹은 번개처럼 마음에 찾아든 등불 같은 생각들. 작은 깨달음들을 솔직하게 적은 내용.
-00에게 전화를 걸어 내 감정들을 널어놓았다. 미안하다. 무엇보다도 이러고 나면 스스로 처참하다. 언제쯤 내 이 한계가 극복됐노라고 일기에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요즈음 나를 매료시키고 있는 말은 ‘금강석’이다.
지난 화요일 수영을 하면서 들었던 금강석 같은 깨달음에 내내 사로잡혀 있다.
책이 많이 팔리기를, 성공하기를 꿈꾸다가도 욕심에 아차, 한다. ‘깨달음’에 대한 지향은 그나마 나를 순수하게 해주는 힘이다.
-나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야무지고, 독한 것 같지만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 이것이 나다.
-근본적인 욕망은 잘난 체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결국은 겸손의 문제다. 냉정한 응시가 필요하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초석임을 다시 생각한다. 어젯밤부터 오늘 내내 그 감정 때문에 괴로웠다. 이제 다시 일기장에 비참하고 부끄러운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겪는 감정의 복잡함, 괴로움의 뿌리는 욕심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욕심, 남편과 내가 꿈꾸는 삶을 위한 욕심. 그런데, 이 욕심을 과감히 버리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란 없음을 안다. 목마르게 추구했던 자유는 결국 내 56킬로그램 육체 속에 깃든 욕심이라는 것을. 결국 세상살이의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발판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일이 쉽지 않다, 쉽지 않다, 쉽지 않다. 그래도 내 남은 삶은 이 하나에 달려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갖는 그릇에 따라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의 색깔 또한 결정된다는 것을 안다. 딸과 남편과 그리고 나와 관계한 사람들.
-우주 생명체 시작은 무이고 끝도 무이다. 나 또한 그런 존재지만 생명으로 존재하는 이상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아내 조금은 지루하지 않게 살기. 이것이 나의 고민이다.
-우주 생명의 진실은 더하기 빼기다.
-삶의 찬란함을 즐겨라. 단 깨달음 안에서.
-이제까지 깨달음을 신비한 것으로 여겼다. 이제 아님을 알겠다. 인간이라는 동물로 태어난 테두리 안의 한 인간, 우주 인연들에 의해 ‘나’로 태어난 동물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그저 하나의 ‘동물’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마음의 대자유를 얻은 자! 조건은 같으나 삶의 색깔은 다른!!
-평등, 우주적 연결의 진실. 하나는 그저 하나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가 있기 위해 관여한 우주적 연결! 그러니 어찌 생명의 다양성에 우열을 세울 수 있을까. 하나하나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굉장한 존재, 그 존재들의 평등. 다양한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문제는 반짝이는 깨달음의 지속성이다. 전체성이다.
-요즘은 백창우 선생이 블로그에서 말씀한 “깨달음은 무아(진아)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의식의 질이 바뀐다.”는 말을 내내 곱씹고 있다. 더불어 캔 윌버가 <무경계>에서 이야기한 “의식의 공중제비”에 대해 생각한다.
그 경지가 궁금하다.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