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마음지도>33
“네 제가 제제입니다.”
“저는 KBS 방송국 피디 000라고 합니다.”
전화를 한 사람이 방송국 피디라는 말에 째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해마다 있는 방송국 드라마 극본 공모 당선작 발표가 끝나고, 이번에도 낙방한 째째는 의기소침, 우울하던 참이었다.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런데 왜…….”
“이번 공모에 내신 작품 잘 봤습니다.”
그해 째째가 낸 공모작품은 자유분방한 외환딜러인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혜기의 프리데이'라는 제목의 극본이었다.
“전 최고점을 줬는데, 안타깝게 근소한 차이로 당선작은 되지 못했습니다. 작가님 대본을 드라마로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 기쁜 소식이었다.
며칠 뒤, 째째는 여의도 방송국 근처에서 전화한 피디를 만났다. 키가 작고 소탈한 차림의 남자였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그 작품은 방송을 타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피디는 다른 제안을 했다.
“이번에 새로운 포맷의 드라마를 맡게 됐어요. 함께 일해봅시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째째는 곧 매주 한 편씩 방송되는 단막시리즈 작업을 시작했다.
“생각해 놓은 소재가 있나요?”
“도굴꾼 이야기예요. 문화재 쪽에서는 도굴꾼의 자녀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라마 극본은 피디와의 많은 피드백 뒤에 완성됐고, 그렇게 방송을 탔다.
드라마와 인연은 그러나, 그 작품이 마지막이 됐다. 첫 작품이 방영되고 두 번째 작품을 탈고하고 난 뒤, 생각지 않은 사건이 터졌고 피디는 방송국을 그만뒀다. 편성됐던 드라마 시리즈도 폐지됐다.
아쉬웠다.
그때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난 당신이 소설만 썼으면 해.”
“왜요?”
“아이가 어리잖아. 소설은 집에서 조용히 혼자 작업하면 되는데, 드라마는…….”
나는 남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혼자서 작업하는 소설 쓰기와 달리 드라마는 피디와의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한 작업. 두 편의 단막 작업을 하면서 나는 자주 피디와 통화하고 만났다. 당연히 그럴 때마다 아이는 아이 돌봄 아주머니에게 맡겨져야 했고.
여리고, 착한 남편은 에둘러하는 그 말조차도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나는 알아들었다. 남편은 그 말을 편성 드라마가 폐지된 뒤에 했고, 나는 드라마를 쓰지 않아도 될 맞춤한 핑계로 삼았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이후 10여 년간 방송국 드라마 극본 공모에 응모하며 꿈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 심사단계까지가 한계였다. 뭔가가 부족했다.
가끔 꿈과 욕망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꿈과 욕망에 대해 기준을 밝힌 법륜스님의 말도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절망하고 실망하면 그건 욕망. 쿨하게 다시 도전하면 그건 꿈”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하지만 생명을 살아가게 만드는 꿈이 욕망이 되지 않도록 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살면서 겪는 온갖 갈등과 고통의 해결은 결국 내 안에 자리한 모든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가능할 일일 텐데,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지.
“있잖아.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와 고통에서 벗어나 대자유의 깨달음을 얻고 싶다가도 멈칫하게 돼. 그 경지가 되면 이 재미난 감정들을 더는 느끼지 못할 거잖아.”
한때, 같은 곳을 바라보던 드라마 절친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욕망이 실현되는 그 짜릿함을 버릴 수 없어 욕망을 부여잡고 있었구나.'
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