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3> 우월적 지위 #4

#4. 우월적 지위

by 말랑


손님을 접대할 때 가끔 이용하는 고급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일부러 보여주면서 가장 좋은 코스를 시키는 이상훈과장을 바라보며 김우진대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무실에서 법인장에게 이상훈과장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나노이엔지에 일을 의뢰하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정확한 보고서가 아닌 경험적인 측면에서 검토 의견서로 받아서 설계에 반영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법인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결국 이상훈과장에게 잘 진행하라는 말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나노이엔지에 일을 의뢰하려면 진동설계비용에 대해 본사에 품의서를 올려야 했다. 비용도 문제지만 시간이 추가로 든다는 상황이 법인장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이상훈과장은 몇 가지 검토 의견을 받고 적당히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하였다. 미안함보다는 우월적 지위가 만든 관행이라는 말과 다음에 다른 프로젝트를 같이 하기 위한 관계유지라는 명분으로 미화되는 이런 일에 김우진대리는 혼란스럽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였다. 혼자 부정한다고 바꿀 수 없는 그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관습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이상훈과장은 마치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한 듯 이런저런 일본 문화 이야기, 업무적 한계 등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본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일본에서 10년 동안 사는 사람보다 잠시 여행온 사람이라고들 한다. 이상훈과장은 일본말로 종업원에게 사케를 추가로 주문한다. 어설픈 발음을 종업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알아듣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몇 잔 술잔이 부딪치고 이상훈과장 목소리가 한 옥타브 커졌다. 취기가 오른 이상훈과장은 나노이엔지에 대해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있으면 뭐 합니까 오히려 남들에게 대접받는 전문엔지니어로 일하는 게 더 멋지지, 월급도 많으시죠”

머쓱해하는 박지훈박사 일행에 이상훈과장은 앞으로 여러 업무를 함께 할 수 있을 꺼라며 이번에 잘 도와달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김우진대리는 곤란해하는 박지훈박사에게 담배 피우냐며 그 자리에게 박지훈박사를 구해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상훈과장은 말을 끊는 김우진대리를 한번 노려보고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서 나갔다.

가게 옆 골목에서 두 사람은 담뱃불을 서로에게 붙여주었다. 김우진대리는 담배연기를 내뿜는 것인지, 한숨을 쉬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길게 내뿜었다. 낯선 도시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두 사람 사이에 내밀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문 김우진대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먼저 입을 뗀 박지훈박사는 익숙하다는 듯 자조 섞인 말투로 말을 했다.

“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일본이나 미국, 독일 등에서 엔지니어를 부를 땐 당연한 듯 비싼 비용을 지급하는데 국내 엔지니어들에게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비스로 해달라, 너무 비싸다며 동의 없이 네고를 해버리죠. 아직은 기술보다 문화 수준이 못 따라가는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김우진대리는 대답이 찾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저녁식사 자리는 무거운 듯 가벼운 듯 여러 번의 분위기가 바뀌어가며 이어졌다. 이상훈과장은 일본산업의 문제점과 한계를 토론이라도 하러 나온 듯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미 취기가 오른 그래서 속에 담고 있던 답답함을 오늘 여기에 모두 토약질이라도 하듯 내뱉었다. 그 옆에서 김우진대리는 혼자 잔을 들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인 듯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 이 술병이 비워져야 자리가 끝이 날 것 같았는지 술잔을 비워 나갔다.

김우진대리는 급하게 마신 술 때문인지 피곤한 얼굴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책상서랍에 남겨 둔 두통약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먹은 듯 찾을 수 없었다. 김우진대리는 맞은편에 앉은 여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일본 두통약을 건너 받아 탕비실로 들어갔다. 약도 국민성을 따라가는지 즉각적인 반응이 없었다.

모니터 화면이 흐릿해 보여 눈을 비볐다. 여전히 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듯 화면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를 약간 뒤로 밀어 살짝 눕듯이 앉아 눈을 감았다. 박지훈박사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아 바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오전 중으로 본사에 회의결과 보고서를 보내야 했다. 자세를 고쳐 잡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이메일이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이상훈과장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승진에 목말라 뭐라도 자신의 실적으로 잡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결론 없는 회의 뒤에는 은근슬쩍 김우진대리에게 작성해서 보내라며 빠지더니, 이번에는 기안자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보내왔다. 김우진대리는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하여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보고서에는 나노이엔지의 도움을 받아 대책안을 마련 중이며, 5일 내로 설계도면에 반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노이엔지 견적내용과 비용은 없었다. 한참을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키보드에 올려놓은 손가락은 못에 박힌 듯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등뒤에서 이상훈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본사에서 승인받기도 힘들 테니 그냥 컨셉만 받아 설계사에 넘겨주면 된다는 말을 던지고 능글스럽게 웃으며 나가버렸다. 김우진대리는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빌딩숲 속에서 비명처럼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소리 질러본지가 언제쯤인지, 속으로만 속으로만 감정을 삼키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지내온 자신의 모습에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든 게 뿌옇게 흐려져 보였다. 담배를 입에 물며 서둘러 눈물 자국을 닦았다. 속에 쌓인 감정의 찌꺼기를 토하듯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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