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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Jun 17. 2021

사랑에 이르는 소통의 여정, <만추>

애나와 훈은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난다. 훈은 차비를 빌려 달라 말을 건네고 애나는 훈을 잠시 응시한 뒤 돈을 빌려준다. 훈은 만나서 반갑다 인사하고 애나는 ‘돈 안 갚아도 된다.’ 라고 말한다. 훈은 애나에게 돈 갚을 때까지 갖고 있으라며 시계를 주고 애나는 귀찮다는 듯 시계를 옆자리로 치워버린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이들의 대화는 그 후로도 내내 이런 식이다. 짧은 순간의 강렬한 만남을 다룬 사랑영화임에도 이들이 나누는 언어는 서로에게 온전히 닿지 못한다. 거부당하고 미끄러진 채 안개처럼 흩어진다. 중국계 미국인인 애나와 미국에 머무는 한국인인 훈에게 영어는 타인의 언어이지만 영어로 나누는 이들의 대화가 소통에 이르지 못하고 어긋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엄마의 부고로 인해 7년 만에 감옥에서 외출한 애나는 말이 별로 없다. 그녀의 얼굴은 배신당한 사랑과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집착하던 남편을 죽인 잔혹한 기억이 박제된 듯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그녀는 고향인 시애틀에 와서도 타향처럼 내내 서성거리고 가족과 공유할 일상의 언어 또한 갖지 못한다. 그녀는 가족에게조차 이방인이며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이다.       

              

그래선지 애나가 구사하는 언어는 간결하다. 자신을 설명하지도 포장하지도 변명하지도 않기에 수사법이 필요 없는 것이다. 애나는 그 흔한 ‘잘 지냈니’ 라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대신 희미한 미소만 짓는다. 그런 그녀가 최소한의 의사소통 외에 말을 할 때는 말 속에 담긴 거짓을 바로잡을 때다. 애나는 옛 연인의 하나도 안 변했다는 말에 비로소 입을 열어 많이 변했을거라 응수하고 애나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걸었다는 훈의 말에도 웃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대답한다.         


애나의 말에는 그러므로 언어가 흔히 품고 있는 미혹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언어에는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의 그물망도, 자신 혹은 상대방을 속이거나 배려하기 위한 거짓도 거세되어 있다.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을 유보시키며 현재를 구원하는 주술적 기운이 휘발된 그녀의 언어가 담아내는 것은 자신의 차가운 맨살뿐이다. 그녀에게 말은 현실과 시간 속에서 의미가 변질된 채 빈 껍데기만 남은 상처이며 절망인 듯하다. 그래서 누군가 들어줄 거란 기대 없이 몸으로 말하는 애나의 언어는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독백에 가깝다. 하지만 애나의 독백은 훈을 만나 대화가 된다. 훈이 그녀에게 대답을 하기 때문이다.                     


누님들에게 기쁨을 주고 돈을 버는 훈은 애나처럼 주류 사회의 주변인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듯하고 먹고 살기 위해 거짓말도 밥 먹듯 하지만 훈은 인생을 즐기는 듯 보인다. 그에게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으면서도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는 보통 사람들의 강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훈의 언어는 마음에 들 때까지 과장된 표정으로 바꾸는 자신의 헤어스타일 같은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애나와 결혼할거라고 말하는 훈에게 애나의 옛 연인이 애냐를 아냐고 묻자 훈은 왜 다 알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게임하지 말라는 옛 연인의 경고에도 훈은 “왜? 게임은 재밌어 애나를 웃게 해” 라고 대답한다. 훈의 언어는 애초에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단지 자신을 그리고 애나를 웃게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듯 정반대의 이유로 애나와 훈에게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말은 더 이상 진심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통로가 아닌 듯하다. 그래서 훈은 애나의 거절의 말이나 침묵 앞에 다른 사람들처럼 오해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대신 데이트를 제안하고 애나가 중국어로 쏟아내는 고백을 다 알아듣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경청하며 중간 중간 자신이 아는 유일한 중국어로 추임새를 넣듯이 화답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는 애나의 질문에 훈은 “하오 하오, (좋아 좋아)”라고 답하고, 다시 만난 버스 안에서 둘은 처음 만난 듯 인사하며 거짓말로 서로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이 어긋난 대화의 행간을 메우듯이 애나의 무표정한 얼굴에 피식 피식 웃음이 담기고 애나의 웃음을 보고 싶어 하던 훈도 따라 웃는다.    

             

<만추>는 언어의 미혹을 뚫고 몸으로 나누는 독특한 대화를 통해 소통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이 소통이 죽어있던 시간을 깨워 다시 삶을 꿈꾸게 하는 기적, 즉 사랑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그래서 애나는 다시 홀로 남지만 더 이상 서성거리지 않는다. 대신 다시 만날 순간을 위해 인사말을 연습하고 웃음을 지으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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