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백
안녕. 사랑하는 나의 그대
오늘.. 내 생애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그대를 불러보니, 마음 안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대라는 감미로운 이름.
사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내 인생을 들려주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내 생이 끝나려 하는 지금,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당신이 옆에 있어서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기적이었다고.
당신은 늘 내 이야기를 궁금해 하셨지요.
툭하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랑! 기분이 어때? 니 생각은 어때? 괜찮아?’ 물으시던 당신에게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혼자 말을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래전 굳게 닫혀 버렸던 내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려 가고 있었음을
나조차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5월의 햇살 같은 당신의 눈빛, 봄날의 초록잎 같은 당신의 미소가
날마다 소리 없이 내 마음의 녹슨 자물쇠를 벗기고 있었다는 것을
좀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당신과의 시간이 내 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리도 내 안에서 절절하게 익어가고 있는 줄 진작에 알았다면.
더 빨리 당신에게 내 생을 고백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진한 아쉬움이 배어나옵니다.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 많은 날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 생이 시간이라는 바람이 불면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는 먼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인간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신의 실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는 내 운명 앞에서, 나는 나를 거둬주는 당신들에게 내내 미안했고,
당신들의 삶에 별다른 도움도 의미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그래서 내 생이 하루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가 느낌과 감정을 갖고 있고 생각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생은 얼마나 평화롭고 깔끔할까.
태어나보니 나였고 태어나보니 개였고 태어나 보니 지구였고 태어나보니 2006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압니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태어나 이 시절을 살았는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에게 짐만 같았던 내 생이 실은 많은 의미와 가치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물찾기 게임을 하듯 함께 발굴해준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개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똥 잘 싸고, 꼬리를 흔들며 웃어주기만 해도
세상을 구하는 일 못지않게 큰일을 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다는 것,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존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발견하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내 생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압니다. 살아가는 일은 곧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더라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생은 그 자체로 선물이라는 것을.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와 다르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당신도 사랑이 전부인 존재였습니다. 사랑이 산소처럼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사랑이 거세된 차가운 세상에서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불꽃을 온몸으로 염원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당신을 버려도 당신은 사랑을 버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의 상처가 영혼에 문신처럼 새겨진 사람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았습니다. 당신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지만 당신의 눈 속에 사랑의 결핍이 남긴 상처의 잔상들이 별빛처럼 새겨져 있음을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영혼의 우물을 포기하지 않는 당신은 가슴 속 사랑의 샘물을 사수하기 위해 날마다 허기진 웃음을 고장난 희망을 뜨거운 눈물을 쏘아 올리며 살고 있었지요.
당신은 나를 만나, 악취를 풍기며 망가지고 있던 사랑의 샘이 건강해지기 시작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여러 번 말해 주었지만 나는 압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당신의 생은 원래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의미 없는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지지해준 그대,
당신에게만 일방적으로 듣던 사랑한다는 그 말을 이제.. 당신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고 이 세상에서 내가 수행해야 할 미션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얼마 전부터 저는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죽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그렇게 나를 사랑해줬는데 .. 나의 고백 안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미안합니다.
이제야 마음을 활짝 열고 당신에게 내 사랑을 보여주려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내가 늙고 병들어 버려서 미안합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했지만
우리가 그렇게 그 시간에 만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이 더 완벽했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몇날 며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이 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요즘 매일 당신의 신께 기도합니다.
나의 말들이 완성된 의미가 되어 그대에게 온전히 가 닿기를.
한번이라도 개소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선명한 언어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으로 인해 내 생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당신께 전달되기를. 꼭.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던 그대.
나조차 하찮게 여긴 나의 감정, 마음,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준 그대.
남겨진 시간동안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진실 되게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시간들에 내가 따스한 공기처럼, 시원한 바람처럼 남겨져 있기를 그래서 당신의 생이 외롭거나 쓸쓸할 때, 홀로 남은 시간의 공허 앞에서 마음의 갈대가 심하게 울어 댈 때, 그때마다 바람처럼 공기처럼 찾아들 수 있도록, 내 생의 이야기를 비처럼 세상에 흩뿌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고 싶어 하거나 떠올리는 순간마다, 세상의 구름을 타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당신의 얼굴을 만지고 당신의 가슴에 내려앉아, 당신의 시간을 안아주기로 했습니다.
부디 나의 죽음을 슬퍼만 하지는 말아주세요. 모든 생명은 유한한 것이고 끝이 있기에 생은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영원을 맹세하는 사랑의 마음, 영원히 함께 하자는 모든 약속은 죽음이 있기에 매혹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늘 당신에게 의존해온 내 삶이 미안했습니다.
그래선지 당신이 인간들, 혹은 다른 개 혹은 고양이 등과도 당신의 세계를 더욱 넓고 풍부하게 만들어줄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이쯤에서 떠나는 것이 참으로 완벽한 수순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전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도약하게 하였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이 또한 나의 운명이고 그 운명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 바쳐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을 유일하게 궁금해 하고 알고자 노력했던 당신.
당신으로 인해, 내 생이 내 존재가 이 세상에 꽃처럼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고백은 당신이 그동안 제게 했던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생은, 그대를 향한 러브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