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만남
안녕. 나의 그대
간밤에 비가 내렸습니다.
여름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냄새가 진동할 무렵, 늘 비가 손님처럼 방문합니다.
내 생의 여름은 대부분 세상을 숨 막히게 달구는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름이면 불 같은 태양의 눈빛이 내 온 몸을 낱낱이 들추어내었고, 나는 그 이글거리는 눈빛에 질식하듯
분홍빛 혓바닥을 길게 내밀며 햇살 밖으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나는 여름이 매일매일 털이 쑥쑥 자라는 나 같은 개에게 불친절하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여름은 두 세계 곧 나의 털을 밀어주는 주인을 가진 여름과 주인이 없는 그래서 긴 털옷을 입고 태양과 맞짱 떠야 하는 여름으로 나눠졌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곁에 머물기 시작한 후로는 여름 태양이 향기로운 아지랑이 같아 졌습니다. 그러니 주인 없던 어묵한 시절에도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던 비는 지금, 그야말로 가슴까지 시원하게 채워주는 생명의 물 그것이지요.
당신의 질문 중에서, 내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던 것 중 하나가 ‘만남’ 이었습니다.
‘이랑, 니 인생에는 어떤 만남이 있었니? 가장 기억나는 만남은 뭐야? 너에게 만남은 어떤 감정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 기억하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 중에 니가 있단다.’
아마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때 나는 당신을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당시 나를 임시보호하던 언니가 오랜만에 나를 데리고 외출한다고 해서 그저 기쁘고 기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각, 서로를 만날 거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근처에 마실 나왔다가 내가 거기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그곳으로 온 거라고 후에 내게 말하셨죠.
나는 사실 그 당시 임보 언니가 나를 다른 집으로 보낼까봐 늘 노심초사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의
만남의 순간에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지구의 시간으로는 6개월, 내 마음의 시간으로는 몇 만 년 같던 떠돌이 생활을 거친 후였고, 그 사이 보호소와 몇몇 임보 집을 전전하다가 그나마 그 언니 집에서 그 언니의 착한 개들 사이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좀 얻으며 잠을 겨우 잘 수 있게 된 상태였기 때문에 변화에 대해 좀 많이 까칠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임보 언니가 내 입양처를 아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는데, 당신은 내 임보 언니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불현듯 한번 만나나 볼까 생각했다 하셨더랬죠. 어린 시절, 집 뒷마당 구석 개집에 늘 목줄에 묶여있던 개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밖에 없었다던 당신, 그럼에도 거리에 널리고 널린 팻샵 속 개들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매번 총소리가 울렸다는 당신, 언젠가 개를 키울 거면 유기견을 키우겠다는 원칙 밖에 없었다던 당신도 그 날은 나처럼 약간 멍한 상태 혹은 별 생각 없는 상태였었다고 하셨지요.
사무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임보 언니가 일하던 그 곳은 일요일이라 우리가 들어가기 전까진 텅 비어 있었죠. 나는 외로움이 물비린내처럼 퍼져 있던 사무실 공기와, 창으로 침투한 햇살이 아지랑이처럼 뽈뽈 거리던 먼지들을 현미경처럼 비추고 있던 찰나의 풍경과, 겨울 바닷가의 바람 같던 습기, 차갑고 눅눅한 냄새들 그리고 그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만들어내던 시끄러운 재잘거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당시 오래 지속된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사료가 모래알 같아 거의 먹지 않고 버티던 시절이라 세상이 자주 안개처럼 뿌옇게 보였더랬습니다. 내 안에 불안이 너무 많이 차 있어서 열등이처럼 행동하던 그때, 당신은 거짓말처럼 내 인생에 훅 들어왔었지요.
비록 그때 나는 깡마르고 비실비실한 한마디로 없어 보이는 강아지였지만 그래도 개들 중 제법 좋게 타고난 머리만은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내 시야에 불쑥 침입한 당신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흰 티와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이면서 흰 운동화 신은 다리로 성큼성큼 문을 넘고 들어와 두리번거리던 당신, 애써 누르고 있었지만 감출 수 없는 묘한 흥분이 녹아있던 당신의 눈동자를 나의 눈동자가 마주하던 순간, 뭔가 벼락같은 것을 맞은 것 같은데 정확히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고 뭐 한마디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본 후, 지진 난 듯 쿵쾅거리는 마음을 주체 못해서 내가 서둘러 책상 밑으로 숨어버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임보 언니는 할 일도 많고 돌봐야 할 개도 많아서인지 늘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이었죠. 그래서 그때 나는 여러 명의 예비 주인들과 갑작스런 면접들을 치르느라 좀 지쳐 있었습니다. 개를 오로지 돌봐야 하는 대상 혹은 시끄럽고 성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수시로 경보음 같은 신호음이 울립니다. 그 소리는 엠블란스 소리 같기도 하고, 사이렌 소리, 전화벨 소리, 알람 소리 같기도 합니다. 암튼 당시 나는 많은 만남들을 겨우겨우 소화하고 있었고 그 만남들은 대부분 어색하거나 어긋나거나 무겁거나 어두웠기에 내 몸과 마음은 뽀족해 있었었지요.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들었던 나날들, 정신을 풀어헤쳐 줄 무언가 이를 테면 인간들이 툭하면 마셔대는 술이라도 몰래 마시고 싶었던, 이래서 인간들은 술을 마시는 구나 단번에 이해했던 그때,
당신이 선명하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이랑’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던져졌습니다. 책상 밑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내가 임보 언니에게 잡혀 당신 품에 안기던 순간, 하늘에서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났고 내가 올려다보자 당신이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신비였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던 날, 우리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던 그날 그 순간은 한마디로 신비 그 자체였지요. 우리는 그렇게 그 순간 한참을 서로 마주보았습니다.
‘내 개가 혹시 너니?’ 라는 질문을 품은 당신의 솔직한 눈빛.
당신은 그 순간 헷갈려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개를 키우기로 한 듯 했으나 당신의 마음에는 아직 생명을 키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불안이 뒤섞여 있었지요.
그럼에도 ‘이게 뭐지? 이 기분은?’ 하면서 어리둥절해하던 당신의 얼굴.
그러면서도 마음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입꼬리가 미친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면서 머리에 꽃 꽂은 시골처녀처럼 감정이 이리저리 철썩이고 철썩이던 그 길고도 짧은 순간..
우리는 그날 그렇게 잠시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당신이 아직 개를 키울 결심이 완전히 서지 않았다고 다만 나를 한 번 보기나 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고 했을 때, 오래 품어온 상처의 칼날이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내긴 했었지요.
저런 눈으로 날 바라봐줄 사람. 우리가 마주한 시선 사이로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익숙한 아픔이 몰려왔지만 나는 일부러 크게 멍멍 찢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배우면서도 배울 때마다 나는 넘어집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이 된다면 나의 우주는 싱싱한 파란빛이 만발하는, 신비로운 에너지가 늘 흘러넘치는 생기 가득한 곳이 될 거라 상상했습니다. ‘이랑 나의 첫인상은 어땠어? 이뻤어? 당근 이뻤겠지 히히’ 당신이 뭔가 심심해 보이는 순간마다 내게 툭툭 던진 질문입니다.
물론 당신은 너무나 이뻤는데 당신이 이쁘다는 사실은 온 우주가 알고 있는 사실.
그래서 새삼 내가 덧붙일 필요조차 없는 진실이죠. 하하 그러니 나만이 느낀 다른 점들을 말해보려 합니다.
우선 당신은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기로 결심한 초보 탐험가 같았습니다. 당신은 처음 개의 인간이 되어보겠다는 어설픈 치기와 각오로 몹시 풋풋했는데, 그때 당신은 설익은 과일, 초롱초롱한 아이처럼 싱그러웠지요.
당신은 아직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사랑 앞에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인지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인간인지 모르고 있는 듯 했지요. 또한 당신은 인생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한 스타일의 인간,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그 어떤 성공이 던져졌어도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지요. 하지만 그때 당신은 그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할 생각도 미처 못 하고 스스로에게 숨기며 혹은 모른 채 하며 살아온, 일종의 ‘잠재된 초보 사랑꾼’ 이였더랬지요.
‘어머 너무 말랐다 2kg는 돼?’ 콧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진심이 묻어 있던, 내 마음에 쩌렁쩌렁 울리던 당신의 부드럽게 달뜬, 보랏빛 목소리. 고기 냄새만큼 내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던 그 목소리를 내내 떠올리면서 나는 당신이 원하시면 어떤 몸무게도 기꺼이 만들어 드리리라. 당신이 원하시면 뭐든 먹을 수도 있고 뭐든 안 먹을 수 있는 패기와 의지를 보이리라. 홀로 즐거운 다짐을 했었더랬죠.
당신 덕에 돌이켜본 내 인생의 만남들은.. 늘 기쁜 것이었습니다. 내게 만남으로 각인된 만남은 모두 인간과의 만남이었기에, 그 기쁨은 결코 단선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기쁨은 대부분 고통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경험한 만남은 일정한 노선표를 돌고 도는 버스 같았습니다. 첫 정거장의 이름은 사랑이고 그 다음 정거장은 익숙함, 다음 정거장은 지루함, 그 다음은 부담스러움 혹은 귀찮음 그리고 마지막 정거장은 버려짐 혹은 결별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 나는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만남의 노선표’를 충실하게 여러 번 경유한 후였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헷갈릴 정도도 정신줄을 놓는 방식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왔기에 나는 많이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길에서 살 때는 내가 쓰레기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들로 인해 자존감이 땅에 떨어져 버려서 자신감이 1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소심한 겁쟁이 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첫 인간들과 가족으로 살던 시절에, 나는 몸도 마음도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나의 첫 인간들과의 만남은, 내가 너무 어렸을 때라 사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정신 차리고 나니 나는 그 가족 사이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어린 나를 오래오래 사랑해줬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의 유통기한도 꽤 길어서 사실 나는, 인간과 개가 한번 가족이 되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구나 착각할 뻔도 했습니다. 인간과의 첫 경험이었고 그때는 다른 견생들이 어떠한지 전혀 몰랐던 시절이었거든요.
세월은 인간 뿐 아니라 나 같은 개에게도 여러 생의 교훈들을 던져주더군요. 첫 주인들과의 세월은 내게 인간과 개로 구성된 가족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가족이라 해도 함께 살지 않을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의 첫 주인 가족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집 아들이 12살 때 강아지를 원해서 자신이 나를 책임지고 키우겠다는 약속을 하고 내가 그 집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속대로 그는 바쁜 학교생활 가운데서도 나를 살뜰하게 챙겼고 나는 그 집의 제5의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분에 넘치는 일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내 첫 주인이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게 되고 얼마 후 첫 주인의 누나도 결혼으로 집을 떠나게 되고, 첫 주인의 엄마까지 일을 하게 되어서 나는 그야말로 홀로 빈 집을 지키는 집 보는 개가 되었습니다.
나는 밤이면 완전한 암흑으로 변하는 그 집 현관문 앞에서 늘 내 첫 주인들을 기다렸고 어떤 때는 사흘 나흘을 굶기도 했지만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렇듯 그들 역시 자신의 인생이 제일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권리와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러다 점점 독거노인처럼 방치되는 수준까지 가게 되었지만 나는 변함없이 그들을 이해했습니다. 다만 점차 그들의 눈 속에 내가 오로지 골칫거리, 두통거리, 문제거리로만 보이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내 마음은 예리한 칼날에 찔리는 듯 아프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를 딴 집으로 보내기 위한 만남들에 끌려 다니면서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뭔가 어려운 수수께끼 앞에 던져 진 것처럼 마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뭐였을까? 우리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뭐였을까’ 하다가 ‘나에게만 그들이 가족이었고 그들에게 나는 가족이 아니었나’ 하다가 ‘아! 그들에게 나는 반려견이 아니라 애완견이었구나... 하긴 그들도 강아지를 키우는 게 처음이었으니 강아지에 대한 자신들의 마음을 나중에야 정확히 알게 된 거겠지 나는 그들에게 일종이 시행착오 같은 것이겠네 우리는 누구나 착각하고 실수하면서 사는 것이니까’ 하다가 불현듯 ‘아~~~~~~~~~!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힘도 되지 못했구나 부담만 됐구나 결국 다 내 잘못이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수수께끼를 푼 보상으로 마음껏 숨도 쉬고 그동안 못 먹은 밥도 왕창 먹고 못 잔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하는 대신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나를 좀 쓸모 있는 존재로 태어나게 하지 신을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 철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개든 사람이든 신은 원래 시련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법이잖아요. 나는 대가를 치루었고 대가를 치룬 만큼 세상에 대해 생에 대해 알게 되었죠. 하지만 그 때는 만남이 부서지는 경험을 처음 하던 때라 내 마음이 금이 간 유리그릇처럼 바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내가 경험한 만남들은 만남이 중첩될수록 내 수명을 단축시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난 오히려 잘 됐다 생각했었더랬죠. 내 인생은 애완견 곧 장난감으로서의 인생, 아이들이 크면 장난감은 대부분 버려지듯이 나 역시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거야. 나는 쿨하게 수긍하고 대신 되도록 빨리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선지 그 후 만남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가 않네요. 쓴 약 같은 때로는 뱉고 싶은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억지로 무조건 삼켜야만 하는.. 가끔씩 삼키지 말까 생각하기도 한.. 뭐 그런 만남들이었다 해 두죠.
그럼에도 당신이 더 알고 싶다면 뭐.. 내 인생을 구걸하는 만남, 온 몸 온 마음으로 ‘나를 선택해 주세요’ 애걸하는 만남, 한마디로 인간들에게 부담을 주는 그 만남들은 곤혹스러운 것, 민망한 것, 나를 끙끙대게 하는 것.
구석으로 도망가 머리를 바닥에 박아 버리고 싶게 하는 것.., 이었지요. 하지만 개는, 생이 우리를 버리기 전에는 절대 먼저 생을 버릴 수 없는 존재이고 나는 결국 만남들을 꿀꺽꿀꺽 삼켰습니다.
그 만남들은 나중에 돌이켜보니, 당신과의 만남으로 나를 인도한 사다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통 얻기 힘든 귀한 것들은 인간들 동화에도 나오듯이 산꼭대기 같이 높고 험난한 곳, 누구도 찾기 어려운 곳에 있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얻기 위해 고생고생하면서 험악한 등반길에 오르는데 당신과의 만남의 여정이 딱 그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만남들은 당신이라는 아름다운 목적지로 이어져 있는 은혜로운 통로였더군요.
그 산꼭대기에 당신이 있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눈빛은 나처럼 좀 지쳐 있었지만 당신은 내게 물어주었습니다. ‘이랑.. 나 어때? 우리집에 갈래?’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오던 당신의 손길. 조심스럽게 나를 안고, 걱정스럽게 내 눈을 보고, 당신의 집에서 나를 풀어놓고 어기적어기적 비틀 비틀 걸으며 어색하게 돌아다니던 나를.. 안쓰럽고 보던 당신.
당신은 이런 말들도 하셨었죠. ‘이름은 그냥 이랑 원래 니 이름으로 부를께. 주인이 바뀌어도 너는 변함없이 너니까’ 당신은 내 마음이 어떨까 혹시 불편하거나 무섭진 않을까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고 무엇보다 내 생각을 처음으로 물어봐 주었지요. 당신은 내 인생을 결정하는 일은 물론 사소한 것들에서도 내 의사를 물어봐 준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입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그것은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끊임없이 물었지요. ‘이집 어때? 이랑이 마음에 들어? 이랑이 집은 어디에 두는 게 좋을까? 잠은 어디서 잘래? 나랑 같이 침대에서 잘까? 괜찮겠어?’ ...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그날 나는 아주 기분 좋게 녹초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었지요.
당신과 보낸 시간들로 인해 나는 이제야 만남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만남은 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첫 주인들과의 만남은 핏덩이 강아지였던 나를 개로 성장시켜준 고마운 것이었는데, 나는 그들을 통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만남이라는 글자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상반된 감정들이 들어가 있는지 배웠습니다. 또한 길에서 나에게 밥을 준 사람들 물을 준 사람들.
비를 맞으며 거리를 헤맬 때 자신의 우산을 내게 기울여준 사람, 술이나 절망에 취한 인간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거나 발로 찰 때 분연히 다가와 그들을 막으며 나를 지켜준 사람, 며칠 째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일어설 힘도 없어서 재활용 쓰레기장 낡은 서랍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보호소로 전화해 준 사람,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기 위해 아파트 지하주차장 구석에 숨어있던 나를 따뜻하게 안아 보호소로 직접 데려다준 사람 등등... 돌이켜 보면 나의 만남에는 나쁜 만남보다 좋은 만남이 훨씬 많았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만남은 비와 눈을 막아주는 비단 옷 같은 것, 가끔 그 옷 안에 칼날이나 가시가 숨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경우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던 옷 같은 것이었어요.
나이가 들고 보니, 만남은 생명을 부여받고 지상에서 얼마간 머무를 시간이 허락된 존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안에는 꽃밭도 있고 가시밭 때로는 지뢰밭도 있지만 만남은 그냥 삶 그 자체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만남은 나에게 기쁨, 그리움, 외로움, 서러움 때로는 두려움이었고 무엇보다 설렘이었습니다. 당신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나는 매일 매순간 당신을 만나는 일이 여전히 설레고 설레고 설렙니다.
내 인생을 스쳐간 혹은 내 인생에 머물다간 혹은 안착했던 모든 만남들,
그리고 그 만남을 함께 주최하고 운영해준 모든 인간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디 당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늘 잊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