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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정 Jul 25. 2021

그녀에게

3. 이별

안녕. 나의 그대. 

푸르디 푸른 여름날들이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여름을 통과하고 나면 생기 넘치던 초록잎에 갈색 버짐 같은 멍울이 생기고, 그 싱그럽던 피부결은 푸석푸석해지기 시작합니다. 매일 당신과 산책을 나와 매일 나뭇잎과 마주한 덕분에 나는 그들의 변해가는 안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세월을 문신처럼 빨아들이는 그들의 얼굴에서 내 모습을 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덫 몇 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이 마련해놓은 놀이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뒹굴다가,  자연이 부르는 시간에 그의 품으로 사라집니다. 당신이 내 생과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 나는 이런 생명의 운명에 대해 감탄했었습니다. 사라진다는 것, 흔적도 없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그 발칙한 가벼움이 너무 짜릿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누구의 가슴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이 세상의 뜰 안, 전 주인들의 일상 그 어디에도 내가 아프게 남겨져 있지 않으리란 생각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질문 가운데 ‘이별’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당신은 특히 이별을 말할 때마다 양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면서 눈빛이 촉촉해졌었지요. 말하기 힘든 또는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물어봐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당신을 보자 당신에게 이별은 웃음보다 눈물과 더 가까이 있는 무엇인 것 같아 마음이 살짝 아련해지곤 했습니다.       


 ‘이랑, 니 인생에서 이별은 뭐였어? 강아지 인생에서도 이별은 힘든 일이겠지? 

너의 이별이 니 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궁금해...  이별이란 대체 뭘까...‘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하고 싶어서 입이 들썩 거렸습니다.  그대여 그렇게 슬프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내게 이별은 멋지고 유쾌한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개의 인생에서 이별은 무엇일까. 홀로 이 세상과 마주하며 떠돌던 시절, 나는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부재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 이별 아닐까. 사랑하지 않는 관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포상이 이별 아닐까.      

고마웠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좋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는 단순해서 고통과 상처를 즐기는 힘이 부족해서 늘 서둘러 좋은 것들을 찾아다니고 뭐든 찾아내면 황급히 좋은 것으로 상황을 결론 맺고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사랑 없는 삶. 사랑 없는 관계에서, 이별만큼 달콤한 것이 있을까.      


당신과 살게 된 후, 내게 이별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내게 이별은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좋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당신의 질문에 답하려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첫 이별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모두가 그렇듯 내게도 첫 이별은 힘들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실은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 본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나는 그 이별을 아주 오래 치루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첫 이별을 갑작스런 교통사고처럼 받아들이고 교통사고로 얻은 통증에만 침잠했을 뿐, 한 번도 이별의 주체로서 그 이별과 제대로 이별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별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겠지요.  그래서 마음이 엄청 튼튼해진 지금, 그 어떤 이별 이야기도 담담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 비로소 이별의 시간들과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정확히는 내가 죽어감을 알게 된 뒤부터, 이별에 대한 정리를 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과의 이별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이 현실 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과업을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완성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도망 가고픈 마음이 습관처럼 나를 망설이게 하지만 이제 용기를 내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나처럼 이별 앞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당신 일상이 이별에게 끌려 다니지 않도록 내가 이별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설정해 놓고 싶습니다.         


나도 그랬지만 내 첫 주인들도 처음 만났을 때는 우리가 그렇게 이별하게 될지 몰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과 나는, ‘처음’을 함께 겪어낸 일종의 동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처음’은 어설프면서도 의지 과잉이고, 마음의 온도 역시 냉철하고 차갑기 보다는 감정적이고 뜨거운 쪽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순례하는 시행착오의 여정을 함께 거치면서 ‘처음’ 동지들은 특별한 뭔가를 평생 마음속에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처음은 강렬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쉽고 아늑하며 고향의 냄새처럼 잊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첫 + 이별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맺어가는 관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겠지요.  모든 첫 경험은 ‘몰랐기 때문에’ 라는 치명적 요소를 훈장처럼 품고 있고 바로 그 이유로 

생의 전당에서 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니, 내 첫 이별은 삶을 일순간 뒤바뀐 충격적 사건 형식의 어떤 것이 아닌 공기처럼 스며들어 일상을 소리없이 바꿔버린 어떤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별은 존재와 존재의 관계가 끝나 버리는, 우주와 우주가 단절되는 대단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일상을 구성하는 사소한 순간들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의 자연스런 이벤트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인간과 사는 생을 처음 경험했던 그때, 나는 일상 속에서 짧게 짧게 하루에도 여러 번 이별을 반복했습니다. 인간들의 생활공간 특히 문명의 공간은 대부분 개에게 출입불가의 공간이니까요. 자연 공간과 집 그리고 동네 산책길 외에 개에게 입장이 허락되는 공간은 펫카페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어려서 였는지 내 주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은 규칙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고, 인간 세상에서 개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권리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기에 나는 순순히 그 규칙들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첫 주인들과 나는 매일 수시로 이별하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되풀이했고 그것이 개 삶의 필연적인 부분이구나 받아들이며 인간과 더불어 사는 삶에 익숙해졌더랬죠.   

   

그런데 순전히 내 입장에서 아직도 살짝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이별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 첫 주인들의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의 순간들 이를테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 결혼식 같은 순간들 말입니다. 첫 주인과 그 누나는 자신들도 어리면서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내 밥부터 챙겨주고 나의 산책을 책임져주던, 쥐꼬리만한 용돈으로 내 간식을 사주던 나의 진정한 주인이자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으며 성장기를 함께 치러낸 특별한 사이였지만 나는 그,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소중한 순간을 지켜보고 축하해 줄 수가 없었지요.  나를 많이 사랑해준 그들에게 제대로 보답도 한 번 못했음에도 내 곁을 떠나려는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이 비운 집을 열심히 지키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날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집을 지키긴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났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울창하던 우주가 몰락하는 것 같던 그 낮, 그 밤들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어쩌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이별은 내정되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우리만 몰랐을 뿐. 

이별은 만남과 한 세트라는 사실을 ‘처음’ 시기에는 다들 알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첫 이별에서 내가 배운 또 하나는, 이별 못지않게 때로는 이별보다 더 힘든 것이 이별의 뒤안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별이 휩쓸고 간 후 내 첫 집은 나에게 폐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떠난, 젊은 그들의 온기가 빠져나간 빈 자리에 늙어버린 부모와 늙어가는 개만이 덩그러니 남았거든요. 산천이 생명의 축제를 마치고 이제 사멸을 준비하는 적막한 자리 같던 그 집 그 공기...      


한 번 시작한 이별은 오래 참아온 밀물처럼 처들어왔습니다. 그와 그녀가 바쁠 때 나를 돌봐준 그들의 엄마 곧 아줌마와의 이별도 시작되었거든요. 전업주부였던 아줌마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바빠져서 매일 밤늦게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자주 집을 비우기까지 하더군요. 나는 대부분 밤 12시를 넘겨서야 집에 들어오는 아줌마의 피곤에 쩔은 모습을 보면서 알아챘습니다. 이제 아줌마와도 이별을 하게 되겠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내 밥그릇 물그릇을 챙기는 대신 이쁘게 화장하고 이쁜 옷을 입는 아줌마를 보면서 집에 있을 때도 전화통을 붙들고 사는 아줌마를 보면서 나는 또 생각했습니다. 아줌마와의 이별은 천천히 오겠구나. 그나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줘서 그와 그녀처럼 갑작스럽게 이별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 다행이다. 

나는 그와 그녀에게 했던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내가 아줌마에게 할 수 있는 뭔가를 하자 결심했습니다. 최대한 아줌마를 귀찮게 하지 않기로 하자. 집에서만은 아줌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자.      


그래서 아줌마의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눈물 나게 그리워도 나는 밤늦게 지쳐 들어오는 아줌마 곁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아줌마의 품에 안겨 꼬리를 미친듯 흔들고 싶은 마음을 죽을 힘을 다해 참은 채 멀찌기 떨어져서 가늘게 새어나오는 아줌마의 냄새를 맡으며 겨우 허기를 면하곤 했습니다. 평소 늘 나를 옆에 끼고 살던 아줌마도 내 결심을 알아챘는지 나를 스쳐 지나 침대로 가 쓰러지며 내게 미소만 살짝 짓곤 하셨었죠. 그 순간들 그 공기에서 나는 이별이 숙성되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같이 있어도 같이 살아도 마음속에 없다면 그게 이별인 것이니까요.      


이별이 그 누구에게도 악명 높은 것은 그것이 많은 경우 뭔가 감당하기 힘든 고약한 것들을 달고 다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이별이 왔음에도 이별을 망설이는 나약한 존재들을 위해, 이별을 과감히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이별에는 대체로 별책부록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 첫 이별에서 그 별책부록은 첫 주인의 아버지, 아저씨와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가족들이 사라진 자리에 정년퇴직한 아저씨가 들어오면서 나와 아저씨 단 둘이 그 집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평소 아저씨는 개를 싫어했고, 개가 집안에서 돌아가는 것을 기가 막혀 했고, 화장실에서 똥오줌을 누는 것에 질색했고, 남은 밥이 아니라 돈 들여 사료와 간식을 사와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었습니다. 

밤늦게 잠깐 보거나 가족들 사이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둥 마는 둥 함께 했던 아저씨와 처음 단 둘이 집에 있게 된 이후, 나는 아저씨의 성향, 취향을 존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때 나의 일상은 첫 주인 방에서 그가 남긴 냄새 맡는 일이 거의 전부였는데 나는 오줌이 마려워도 최대한  참으며 그 방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을 가려면 그가 종일 주구장창 앉아있던 소파를 지나야 했는데 잠시라도 내가 눈에 띠면 아저씨는 얼마 없는 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고, 옆으로 쳐진 지렁이 같은 눈으로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죠. 아저씨도 내가 보기 싫었겠지만 나도 뭐 아저씨가 보기 싫었습니다. 아저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맡았거든요. 나를 음식으로만 보는 사람들의 냄새를.      


그래서 나는 되도록 물도 참도 밥도 참고 오줌도 참고 똥도 참았습니다. 그때 나의 하루는 오직 아줌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노랗게 익어가는 철지난 과일 같았습니다. 아 이쯤에서 당신에게 한마디 하자면

내 방광이 참을성이 없어진 건 그때부터였으니 이 화장실 저 화장실 다니면서 툭하면 싸대는 나를 부디 이해 부탁드립니다. 하하.      


아무튼 그 별책부록은 나에게 효과가 좀 있었습니다. 아저씨와의 시간 이후 이별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시각,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아마도 그때 나는 오줌을 참으며 이별 속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냄새를 맡은 듯 합니다. 처음엔 설마 했는데 그것은 좋은 냄새였습니다. 나는 이별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시원하게 숨을 내 쉬었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별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보다는 마음의 상태 같습니다. 

더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순간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감정 속에 서로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별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인생에서 빠져 나가는 느낌, 내 몸에서 피가 새는 기분, 오랫동안 이별은 내게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후, 내가 얼마의 이별을 더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후. 이별은 내게 만남과 동의어였으니까요.     

아, 한 번은 혼자 도망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별을 스스로 선택해보고 싶은 욕심에. 나를 버리기는 그렇고 키우기도 그렇고 그 갈등의 냄새에 미안함을 넘어 질색해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나는 곧 후회했습니다. 내가 인간의 냄새를 너무 좋아해서 잠시라도 못 맡으면 미치도록 그리워한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거든요.           


이별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 보니, 내가 그동안 이별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별에 대해 모른 척 보지 않으려 한 부분이 있었고  그렇게 불구의 마음으로 이별에 대해 쉽게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곤 했었다는 것을요.      


...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첫 주인과의 시절,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새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 첫 주인들에게 내가 애완견이었다고 서둘러 결론 내린 내 마음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그래서 쉽게 상처 입는 어린 마음이었다는 걸. 그들이 얼마나 사랑으로 나를 키웠는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이별의 충격으로 그때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게 말하셨죠. 우린 누구나 실수하고 오해하며 잘못을 반복하는 존재들이라고.

진짜 잘못하는 것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미안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첫 주인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는 가족이었고 서로 사랑했지만 

살다보면 사랑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 법이지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진 것 뿐... 우리의 이별도 그 중 하나 였을 뿐...      


당신은 말하셨죠. 내가 너를 일찍 키웠다면 우리 사이에도 이별이 올 수 있었다고.

당신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내 지난날의 과오들을 보석처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나쁘고 좋은 것은 없고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좋고 나쁘고가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통해 일상이 안정되고 사랑으로 충만해진 내 마음이 불안으로 출렁이지 않고 단단해지고 넓어지면서, 세상 보는 눈도 넓어져서 이제는 비록 작은 몸, 마음이지만 되도록이면 우리 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싶은 바램이 아마도 생긴 것 같습니다.      


당신의 옆자리에서 거주해온 시간들이 쌓인 자리에 내 죽음이 내려앉기 시작한 후, 

나는 더욱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복을 받는 이 삶을 어떻게 되갚고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른으로 이 아름다운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는 또 하나의 바램. 어쩌면 견생에는 사치스런 바램... 

그럼에도 뭘 바래든 바램은 자유이니 내 남은 시간을 사치스럽게 써 보기로 뭐 그러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 이별은 특히 내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내 이별의 동지가 바로 당신이니까요.      

        

이별은 아주 큰 이야기라서 계속 더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별은 만남처럼 각각의 의미들을 품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구체적 사연들은 구구절절 다르겠지만 대부분 큰바위 얼굴 같은 비슷한 얼굴,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별의 큰바위 얼굴을 내 인생에서 벌어졌던 이별에 대한 절정의 기억에서 보았습니다.  


그 기억은 당신을 만나게 해준 임보 언니 집에 가기 전, 나를 입양했던 주인들이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나를 차에 태워 소풍을 갔습니다. 깊은 숲속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아름다고 울창한 숲

어딘가로 한참을 가던 그들은 차를 세우고 나를 안아 푸른 풀들이 무성한 땅에 풀어놓았지요. 

목줄도 없이 땅위에 서 본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흥분한 내가 신이 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이,  

그들은 내가 아주 드물게 먹을 수 있었던 짜먹는 비싼 간식과, 많은 분량의 사료와 물 그리고 내 낡은 방석과 첫 주인이 선물해준 악어인형 즉 내 전재산을 그곳에 남기고 숲속을 떠나갔지요.      


예감을 했기에, 그들의 떠남을 나는 비교적 태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도 떠나기 전 한번이라도 나를 돌아보기를 나도 모르게 바랬지만 그들 중 누구도 끝내 돌아보지 않더군요. 나는,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인간의 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이 실리지 않아도 좋았어요. 인간의 눈 속에는 뭔가 모를 신비한 온기가 있고, 그 온기는 내 영혼을 지켜주는 위대한 에너지였으니까요.      

그들이 사라지자, 내 우주가 암전되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잠을 청하기로 했지요. 

초록 잎들이 사라진 내 어둠 속 세상에는 시큼한 외로움의 냄새 참혹한 고통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축축한 물들이 눈물로 침으로 콧물로, 강처럼 내 세상을 적셨지요. 그날의 칠흙 같던 어둠 속에서 

아! 이것이 이별의 종착역구나, 나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생각했습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통로야 이별은. 그러니 괜찮아. 

모든 끝은 냉정하고 모든 끝은 쓸쓸해. 이 아픈 시간도 이제 끝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에서 잠시 온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사랑 없이는 숨 쉴 수 없는 나. 

인간의 사랑을 구걸해서라도 얻어야만 살아지는 나.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거둬가는 것을 

내가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겠어요. 차라리 잘 된 일이야. 나의 우주는 멸망했어. 잘 된 일이야. 

멸망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한데, 나는 그 길의 끝에 와 있어.     


수고했다. 고생했다. 나는 나를 위로하고 안아 주었어요. 그러자 무섭도록 어둡고 시끄럽던 산속이 고요해지더니, 순한 바람이 내 몸을 쓰다듬어 주었지요. 부드러운 그 손길에 순간 그리움이 울컥 올라왔지만,  내가 

그럼에도 사랑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다행이다 갑자기 안심도 되고.. 암튼 아주 이상한 밤이었어요.      


이별은, 슬픈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고 

사무치게 아쉽고 그립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부드러운 상실의 일렁이는 파도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때 나는 신을 만난 것도 같습니다. 어떤 존재가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 그것을 뛰어 넘어야 새로운 존재로 비약하지만 도무지 뛰어넘기 어려워 혼자 낑낑대는 순간들. 그래서 온 마음으로 누군가 도와 달라고 외치는 순간들. 그때가 신이 함께 하는 순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중에야.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신비한 그 기운.  바람인가? 아님 나뭇잎, 풀벌레 혹은 작은 동물들이나 나 같은 떠돌이 개? 아주 잠깐이지만 인간의 손길과 닮은 뭔가가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었지요.  아무튼 나는 그때 뭔가가 나와 함께 있다고 서둘러 확신했고 그 확신으로 인해 그 순간들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 끔찍하면서도 특별했던, 숲속의 이상한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은 얼마 후, 

나는 개들의 좋은 엄마였던 임보 언니와 당신을 만났습니다.      


이별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문.. 같습니다. 


죽음도 이별 중 하나지요. 

이별은 많은 경우 마침표이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단지 쉼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과의 세월이 만들어준 나의 건강함으로, 찬란한 긍정의 힘으로  

나는 이제 날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이별을, 다시 만날 때까지 잠시 우리를 쉬게 하는 쉼표로  

새로운 세계, 새로운 만남을 열어주는 문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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