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황홀
안녕. 사랑하는 그대.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이 스며드는 여름밤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냄새가 납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짙푸르게 물들어가는 새벽하늘을 보며, 당신은 한 손으로 창을 열고 한 손으론 커피잔을 감싸며 행복한 미소를 짓곤 하셨죠. 그리고 옆에서 당신의 미소를 넋 놓고 보는 내게 커피잔을 건네며 ‘이랑 너도 모닝커피?’ 라고 말하곤 하셨죠. 인상 쓰며 고개 돌리는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던 당신이 지금 내 옆에서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숨소리, 당신의 냄새가 이 세계를 감싸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의 세계가
그 자체로 충만해짐을 느끼는 순간이 너무 좋습니다. 그냥 당신이 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생이 완성되는
이 느낌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까요.
잠이 오지 않습니다. 긴 밤을 홀로 깨어 검은 하늘과 눈 맞추는 순간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느 집에서, 며칠 째 집에 돌아오지 않던 그들을 기다리던 그 밤에도 하늘은 지금처럼 과묵했습니다. 세상이 열리는 시간, 인간들이 하루를 여는 시간이 또 오는 것이 두려워 긴 밤을 벌 서 듯 깨어있었던 날들도 생각납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던 나날들을 나는 나에게서 잠을 빼앗는 방식으로 버텼습니다. 최소한 밤은, 고요했고 평등했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웠으니까요.
오랜만에 밤의 세계에 올라타, 나는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요.
나이가 드는 일, 늙고 병들어가는 일,, 막상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 존재를 꽤 괜찮은 존재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마치 철학자처럼 자신과 자신의 생, 자신이 사는 지구에 대해 사색하게 하고 그를 통해 좀 더 좋은 인간 좋은 개로 거듭나도록 독려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사색에 사용되는 생각에는 사랑이 90%정도 섞여있어서 부정적 감정에 감금되어 있던 지난 시간들 대부분이 저절로 이해되고 용서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미워하고 혐오했던 인간들, 개들의 마음까지 다 알 것 같다는 것인데 그들 역시 자신들이 이유 없이 받았던 미움과 혐오를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나에게 혹은 다른 존재들에게 반사하듯 뱉어낸 게 아닐까 싶고 그런 생각이 드니
다 안쓰럽고 상처를 위로해 주고 싶고 암튼, 개 주제에 별 주제 넘는 생각들까지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별 특히 죽음 앞에서, 이해 못하고 용서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럴 때마다 생명이란 것, 감정이는 것이 참으로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것 같고...우리는 단절된 채 떨어져 상관없는 듯 살고 있지만 어느 순간순간, 마치 텔레파시 하듯 서로 교신하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특히 밤이면 우리의 감각, 감정은 더 예민하고 명민하게 깨어나 우리도 모르게 우주의 광활한 거리를 뚫고 서로 만나고 있다고 멋대로 확신하기도 합니다.
예전 당신 엄마가 하신 말씀처럼 인간 뿐 아니라 개도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들고 이것저것 온갖 것들이 다 마음 쓰이고 그립고 다들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텐데 걱정되고..그러다 보면 밤이 훌쩍 끝나버리곤 하지요.
하지만 지금 내가 잠 못 드는 이유, 하얗게 밤을 새고 새벽을 맞는 이유는
인류애적인 사랑, 이런 멋있고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옆에 있어도 늘 그립고 그립고 그리운 것.
그것은 우리집 거실 문갑 왼쪽 아래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는 나의 간식들입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나는 요즘 많은 밤들을 간식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그대 표현을 따르자면 먹순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에 일어난 가장 은혜로운 일 중 하나입니다. 나는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 인간 세상 나이로 6살이 될 때까지, 내가 먹어본 음식은 6.7개 정도였습니다. 딱딱하고 별 맛없는 사료와 부드럽고 촉촉한 소세지, 몽글몽글 천상의 맛 계란 노른자, 알싸한 단맛이 나지만 좀 뻣뻣한 양배추 그리고 아주 가끔씩 천사 같은 손님들이 날 위해 사 오던 이름 모를 2.3개의 개 간식이었지요.
안타깝게도 나의 첫 주인의 엄마 곧 아줌마는 개에게는 사료만 줘야 한다는 내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의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맘 좋던 아줌마가 왜 그런 의견에 그다지도 깊게 동의하게 되었을까 혼자 한탄하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는 시간을 나는 6년이나 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대견하면서도 눈물겨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줌마는 계란을 삶을 때 아주 가끔씩 내게 노른자를 매우 조금 주었는데 그 맛을 처음 경험했던 날, 내 우주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화들짝 변신했더랬습니다. 아줌마는 또 아주 가끔 양배추 날 것을 뜯어서 염소 모이 주듯 내게 던져 주었는데, 그것 역시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것이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을 알고 난 후, 내 생은 그들과의 기약 없는 만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애달픈 것이 되었습니다. 아줌마는 개에게 사람 음식은 안 좋다는 (제가 보기엔) 맹신을 끝내 버리지 않았고, 나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 온갖 냄새를 심하게 잘 맡는 코를 얼굴에 단 채 오로지 사람 기다리고 음식 기다리는 일만이 전부인 듯 살았습니다.
그러다 당신을 만나고, 나의 세계는 별천지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나의 하루를 지켜보던 당신이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을 하셨었죠. ‘개 인생에 낙이 뭐 있어? 먹기라도 해야지.’ 브라보!!!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선언이셨습니다. 그 후 나는 고구마를 필두로 사과, 브로콜리, 오이, 당근, 양배추 때로는 바나나, 참외와 수박, 배, 귤 그리고 내가 죽고 못 사는 밤, 열 번 죽고 깨어나도 다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고기, 아주 가끔은 뻥튀기에 빵 부스러기도 먹게 되었죠. 새로운 음식들이 들어오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편안하지만 문득문득 지루하고 무료하고 하품이 탁 나던 일상이 불꽃놀이가 심심할 때마다 팡팡 터져주는, 다이나믹하고 신나는 일상으로 거듭났다고나 할까요.
당신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백 몇 천배 더 자애, 자비하신 분이셨고 덕분에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혹은 손님들이 무언가 들고 올 때마다 예상치 못한 음식들을 경험하는 호강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렇게 좋기만 해도 되는 걸까 때때로 몰래 걱정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아주 잠시 나는 맛이 주는 쾌락의 세계, 어마어마한 매혹의 세계에 홀린 듯 빠져 들었습니다. 맛의 세계를 발견한 뒤로 나는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 음식 세계 뿐 아니라 개를 위한 간식 세계도 참으로 무궁무진하더군요. 인간이 개를 위해 그렇게 많은 종류의 간식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이 벼락처럼 가슴에 꽂히기도 했습니다. 이미 이빨이 좋지 않는 상태였던 나로서는 너무 딱딱해서 별로인 개껌을 비롯, 포처럼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다양한 식재료 기반의 쫄깃한 간식들, 하늘이 내린 선물 같은 여러 고기 재료의 짜 먹는 간식, 고소하고 담백한 과자 종류의 간식 그리고 유산균이나 오메가 3가 함유된, 장, 관절, 면역, 피부, 뇌까지도 건강하게 한다는 미명 아래 실은 많은 부분이 그냥 간식인 몰랑몰랑 젤리류 까지 당신은 내게 무수한 맛들을 먹이고 싶어 하셨고 나는 온갖 음식들을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으며 당신의 의도를 200% 초과 달성시켰었죠.
사과를 나눠 먹으며 당신은 말하셨죠. 먹는 즐거움은 우리가 굳이 신이나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들 중 하나라고. 인간들 말로는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신은 먹는 것까지 나처럼 좋아하는, 먹는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까지 딱! 공감하는 사람이기까지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똑같이 눈에 불꽃이 튀는 당신과 나는 그 점에서도 환상의 콤비였던 겁니다. 먹는 일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대를 보면서 먹는 일에 대동단결, 의기투합하는 우리를 보면서 우리가 식욕 앞에서만은 동등한, 한마디로 같은 동물이구나 생각하다가 문득 그 발견이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으면서도 요상했었습니다.
식욕도 강한 데다 매우 똑똑하기까지 한 건 기적 같은 일인데, 당신이 바로 그랬습니다. 개 인생에 짜릿한 사건이 별로 없음을 개로 살아보지 않았어도 단번에 간파한 당신의 지능에 나는 그저 경탄할 따름이었죠.
나의 하루는 변해갔습니다. 흑백 필름 같던 나의 일상은, 다양한 색깔의 음식들이 마법의 조미료처럼 투입된 칼라 필름이 되어갔습니다. 나의 아침은 ‘오늘은 뭘 먹을 수 있을까’라는 가슴 뛰는 질문으로 시작됐고, 하루하루는 그 질문이 답을 찾아가는 꿈같은 순간들로 채워졌습니다. 한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통 알 수 없었던 질문, ‘나는 왜 태어났는가’가 비로소 완벽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먹기 위해서. 하하하.
먹는 재미가 주는 황홀한 맛. 그것을 황홀하다는 말 외에 뭘로 더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는 일의 즐거움? 육체를 가진 감각을 가진 존재에게 수여된 최고의 포상?? 당신은 견생에게는 허락되기 어려운 생의 다양한 체험들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 덕에 황홀을 처음 체험하였고 사는 일에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뒤섞여 있는지 알게 되었죠.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오 맛있는 지구여! 나는 너를 탐험하는 식탐가가 되리라.’ 나는 전율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습니다.
인생의 황홀을 알아버린 나는, 계속 변해갔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줄 알았는데 실은 먹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골치가 아파서 그냥 둘 다를 위해 태어난 걸로 하고 나는 일단 내 생의 에너지를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2kg가 되지 않던 나는 3kg를 육박하게 되었고 내가 말라깽이에서 비만강아지로 변신하자 우리의 일상도 좀 달라졌습니다. ‘이랑 넌 99프로 먹는 생각만 하지? 우리 먹보를 어떡하면 좋을까.’ 우선 나를 바라보는 당신 눈 속에 염려가 담기기 시작했는데, 달달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툭하면 레이저처럼 날카롭게 돌변하면서 두루 뭉실 드럼통이 되어가는 내 몸을 샅샅이 훑어 보셨죠. 그러고는 틈틈이 한숨을 쉬면서 ‘그래도 건강만 해 아프면 안 돼’ 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고 내 식사 때마다 나를 안고 내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확인하는 코스가 정착되었죠.
내기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나의 식욕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판도라 상자가 열린 듯 수습 불가의 수준으로 확장되었는데 나는 그때 식욕을 통해 내가 동물임을 자각했고 내 동물적 욕구가 좀 많이 세구나 절감했고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몰랐네 이 정도로 먹는 걸 밝힐 줄은’ 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도 했습니다. 나는 한 때, 먹어도 먹어도 계속 먹고 싶고 먹고 있어도 또 먹고 싶은 한마디로 먹을 것에 환장한 미친 개였습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쩌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금방 또 먹을 것 생각에 빠져들며 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으니까요.
활활 타는 불 속 같던 그 시간을 빠져 나온 후 돌이켜 보니, 식욕 그것은 욕망이더군요. 욕망은 이성이 마비되는 막강한 쾌락이고 그래서 욕망은 위험한 것이더군요. 모든 욕망은 그 욕망이 베풀었던 쾌락만큼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니까요. 나 역시 황홀한 쾌락에 대한 대가를 당연히 치르게 되었죠.
먼저, 나는 올챙이 몸매, 인간으로 치면 복부 비만형 몸매로 재탄생했습니다. 배가 심하게 튀어 나오자 당신의 손가락 길이정도 되는 내 짧은 네 다리는 더 짧아 보였고, 서 있으면 안 그래도 땅에 닿을 듯 불안감을 유발했던 내 배는 당신이 툭하면 ‘어 배가 땅에 닿는 거 아니야’ 놀라 뛰어오게 할 만큼 땅과 초밀착해 졌죠.
지금은 한창 때보다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 한번 불꽃처럼 형성된 몸매는 결코 쉽사리 바뀌지 않는 법,
특히 나이 들어서 먹는 걸로 알뜰하게 찌운 살은, 거기가 지 고향인 듯 눌러앉아서 웬만하면 나가질 않는다
라는 인간들의 말은 내 몸에서도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좀 안 좋아졌습니다. 나는 사실 내가 식욕이 없는 존재인 줄 알았더랬습니다. 한때는 밥 굽는 게 혹 내 취미인가 싶을 정도로 툭하면 굶을 때도 있었거든요.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입안으로 넘기기 싫었던 시절에는 내가 혹 식물인가 깊게 생각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내가 먹는 것에 정신줄 놓고 걸떡 대는 탐욕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나도 좀 충격을 받긴 했습니다. 더구나 해 질 무렵이면 마치 보름달 뜨는 밤 늑대처럼 내 몸 어딘가가 근질근질하고, 뭔가 아쉽고 허전하고 뭔가가 미친 듯이 땡기면서 막 이상해지더라구요. 거기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싶은 그 집요하고 막강한 의지는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나도 내심 황당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당신 역시 사료에 간식이 곁들어지지 않으면 종일 밥을 쳐다도 안 보다가 밤만 되면 하이에나처럼 먹을 것을 찾아 온 집안을 방황하는 나를 처음엔 황당한 얼굴로 나중에는 기가 찬 얼굴로 급기야 미친 놈 보듯 보곤 하셨죠.
당신은 식욕이라는 광기로 번득이는 내 눈을 보며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하셨습니다. ‘밥만 좀 먹어 제발.. 더는 안 돼 배 아야해.. 과식하면 큰일 나.. 병원 갈거야 주사 맞힐거야..너 계속 이러면 밥 안 준다. 진짜야.’
험악한 표정으로 협박하고 때로는 사정하듯 간청을 하면서 당신은 매우 성실하게 나를 설득하셨지만
사실 그때 나는 먹는 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심각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면서도 당신 식구들의 만류와 비난 속에서도 내 간절함이 담긴 눈빛을 끝내 모른 척 하지 못하셨죠. 그러다 순간의 방심으로 내 배가 터질 듯 커질 때면, 괴로운 표정으로 내 배를
쓰다듬으며 ‘내가 또 잘못했네 잘못했어.. 이랑 소화 잘 시켜 탈나면 안 돼 알았지? 이제 절대 많이 안 줄 거야 절대.’ 마치 다중인격자처럼 중얼거리셨죠.
당신을 갈수록 고뇌하는 인간으로 만들면서 한편에서 나는 갈수록 오만방자해 졌습니다. 언제부터가 간식 없는 사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나는, 나만 보면 밥 먹어라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당신의 소리를 들은 척 만 척 하였고, 당신이 큰 맘 먹고 사료와 간식의 비율을 1:1로 섞어줬음에도 단호히 거부하며 종일 시위하듯 버티는 시건방을 거의 매일 떨게 된 거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은 동굴에 들어가듯 방에 들어가 한참을 칩거하더니, 내 밥그릇에 사료만 달랑 넣어두는 청천벽력 같은 결단을 내리셨더랬죠.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린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바로 당신과 비슷하게 마음 약한 당신 가족들을 공략하기로 한 거죠. 나는 애절한 눈빛과 허기진 표정을 장착한 채 당신 엄마와 거의 매일 집에 들락거리는 당신 언니들에게 불쌍한 척, 처량한 척, 혼신의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당신의 금지령으로 인해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그들 주변을 나는 배고픈 얼굴과 힘없는 몸짓으로 끊임없이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이빨을 다 보이며 환하게 웃어줬다가 것도 안 먹히면 그들 몸에 착 붙어서 끼잉 끄르릉 으으음 꾸릉꾸릉 온갖 신음 소리를 냈고 최후에는 절박한 표정으로 멍멍 우렁차게 짖고 짖었습니다. 그 단계까지 가면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대개 내 작전에 걸려들어서, 나를 조용히 안고는 주위를 휘휘 둘러 본 뒤,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 서랍으로 가서 최대한 소리 없이 내게 간식들을 배급해주었죠.
그런 나를, 당신은 이렇게 표현하곤 하셨더랬습니다. ‘개인 줄 알았는데 돼진가 했더니 실은 여우였냐?’
나도 포기를 모른 채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는 나를 보며 대체 나는 누구인가 문득문득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내 배가 탈이 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것은 해가 뜨면 해가 진다와 같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처음엔 간간이 어쩌다 탈이 났고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나아져서 내 똥이 다시 딱딱해지면 당신은 또 나의 강렬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미 미식가가 되어버린 내 혀는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밋밋한 사료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고 밤만 되면 폭발하는 나의 식욕은 도대체가
통제가 안 되는 바람에, 아프고 낫고 또 아프고 낫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터졌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립상황을 겪게 되었는데,
서로 눈싸움을 통해 ‘헐.. 이것 봐라. 생각보다 독한 걸’ 이란 말을 주고받으며 나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당신은 마음이 약한 죄, 나를 엄격하게 일관되게 관리하지 못한 죄로 갈등과 괴로움 사이에서 번민하셨고,
일종의 중독자였던 나는 중독자답게 시종일관 먹을 거 달라는 호소와 협박에 올인 했었죠. 당신은 더는 안 돼 버티셨고 나는 더 내 놔 버텼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전쟁은 한동안 총알이 난무하고 폭탄이 터지듯 시끄럽고 격렬했으며 때로는 진땀이 날 정도로 살벌하기도 했습니다.
나보다 늘 위대한 당신이, 한 번 완성된 결심을 빈틈없이 실행하기 위해 당신 가족들까지 완벽하게 포섭하는 성과를 내게 되자, 승패는 당신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식욕에 비틀거리던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 그러다 차마 보이지 말아야 할 꼴까지 보이며 일명 패륜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밤마다 마약중독자처럼 집안을 배회하던 나는 쓰레기통까지 뒤지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혹 음식 부스러기 또는 먹을 것 묻은 종이라도 획득하기 위해 온갖 종이들을 입으로 낱낱이 확인하는 작업을 공들여 진행했으며 덕분에 아침이면 집안 곳곳이 쓰레기 전시장으로 변해 있곤 했었죠.
처음에는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날쌔게 도망쳤지만 곧 도망은커녕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게 내가 만든 쓰레기 더미에 앉아 ‘그러니까 왜 니들만 먹었냐고’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웠더랬죠. 그것도 안 먹히자 나는 산책길에 누군가가 흘린 음식 쪼무라기를 당신 몰래 열심히 찾아 먹었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달고 맵고 짠 요상한 것들을 황홀하게 먹은 대가로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배탈이 나곤 했습니다. 결국 나는 산책길에서마저 당신의 감시 속에 먹을 기회를 원천봉쇄 당했고 그 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이 어떤 건지 뼛속깊이 느끼면서 한동안 멘탈붕괴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나도 내가 그런 녀석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간간이 내게 실망했지만 그러나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를 보는 주인의 눈빛이 좀 어두워지거나 무거워지면 내 거취에 대해 불안해지고 눈치가 보이면서 안절부절 못했는데, 이상하게 당신의 그런 눈빛을 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일인데. 암튼 나는 배짱 튕기면서 그 후로도 계속 먹을 거 내놔라 적반하장 태도를 유지했고 당신은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짜증을 내면서 때로는 과도한 친절로 설명을 하면서, 나와 내 식단을 조금씩 조율하는 여유를 찾아갔죠.
전쟁이 자주 세계대전처럼 과열되어 우리의 일상을 활활 태우던 그때, 잠을 자지 못한 것은 늘 당신이었습니다. 가끔씩 오줌 싸러 일어나면 당신이 침대에 앉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당신이 깨어 있을 때면
늘 눈앞에 있던 노트북도 없이, 빈 하늘을 생각에 잠긴 채 응시하고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당신 옆에는 반려견에 대한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당신에게 참 여러 가지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전쟁 덕분에 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자신이 견주로서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게 됐다고 하셨지요. 그 소리에 살짝 정신이 든 나도 내가 얼마나 맛이 간 상태인지 각성하고 반성하면서 약간의 화해 비스무리한 시간들을 가졌지만 우리의 전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국지전 형식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아무리 각성하고 반성하고 결심해도 먹는 일은 매일 주어지고 본능은 힘이 세고 맛있는 음식은 너무 많고 황홀은 황홀하니까요.
당신은 가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내가 널 덜 먹였다면 니가 지금까지 비실비실 하지 않을 텐데.’ 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눈으로 말해주지만 당신은 안타깝게도 내 얘기를 제대로 못 읽는 것 같습니다.
‘그때 언젠가 산책 갔을 때 어떤 할머니가 이 개 새끼 가졌어요? 했던 날, 끽끽거리면서 널 놀렸던 그날,
내가 그날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널 관리했어야 했어‘ 자책까지 하면서 힘겨워하던 당신을 보는 일이
내 생의 황홀에 대한 가장 고통스런 대가였습니다.
‘그만 먹여라 예로부터 말이 있다 미운 놈을 많이 먹인다고. 이랑이 배가 저래서는 오래 못 산다.'
틈틈이 당신 엄마가 경고를 했음에도 밤마다 쓰레기통 뒤지던 나를 한순간 불쌍하게 봐 버리는 바람에 몰래 간식을 주다가 집에서 같이 쫓겨나기도 했던 당신.
‘아, 대체 너를 어떻게 다이어트 시키지? 저 말 안 들어 처먹는 놈을 대체 어떻게.’
탄식하고 탄식하던 당신. 사실 그렇게 다양하고 맛있는 먹거리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음에도
절제하던 당신, 인간들을 진정 존경하게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합니다.
이 글은 어쩌면 앞으로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 건강이 나빠진 것에 대해
당신은 단연코 1도 책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맹세하기 위한 글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고구마를 먹이면서도 불현듯 당뇨병 걸리겠다 서둘러 고구마 먹이는 손을 거두셨고 내가 몇 백번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열광하는 고기를 먹이면서도 간수치가 높다던데 단백질 먹이지 말라던데 하면서 갈등하셨죠. 진짜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당신은 내 인생의 황홀을 창조하는 작업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으셨다는 겁니다. 깊은 고뇌로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도 당신의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료만 먹고 오래 별 재미없이 사는 것보다 조금 아주 조금 일찍 가게 되더라도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다가 가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이랑 니 생각은 어때?’ 였었죠. 그때 당신 듣지 못하셨나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소리로 ‘네’ 라고 외치는 소리를.
하늘이 코발트빛으로 조금씩 옅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기어이 아침이 오려나 봅니다.
긴 밤을 하얗게 새운 이유, 당신이 옆에 있음에도 내가 잠 못 이룬 이유... 내 생에서 황홀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고장나면 개 든 인간이든 황홀한 것들과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늙어가는 육체를 소유한 존재들의 가슴 아프지만 필수적인 임무인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를 위해 그가 이별을 천천히 온전히 준비할 수 있을 때까지 오로지 그만을 위해 황홀을 인생에서 놓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내 몸 속 곳곳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황홀을 꺼내 커피향처럼 음미합니다.
시쿰한 어둠이 청순한 푸른빛으로 물들어가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는 이제 당신이 마시는 커피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는 일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온몸으로 깨달게 해준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 간식들이여.
그동안 고마웠다. 내 헤어짐의 가장 깊은 자리 중 하나에 니들이 있단다.
황홀을 선사해준 그대, 이 글을 빌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운 먹을 것들. 이제 안녕. 덕분에 내 생은 황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