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수정 Sep 05. 2021

그녀에게

6. 슬픔

안녕 사랑하는 그대.

비내린 후의 청명한 하늘이 오늘도 한가득 당신과 나의 세상에 반짝거렸습니다. 

‘이랑 난 비 개인 오후가 좋다.’ 언젠가 물기가 찰랑거리던 거리를 함께 걸으며 당신이 한 말을 

이제 나도 당신께 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는 사실 개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 같은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산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당신과 함께 하는 산책은 그 자체로 힐링입니다. 세상 공기를 당신과 호흡하는 순간의 기억들은, 

홀로 걸었던 길에서 만났던 아픔의 습기를 뽀송뽀송하게 제거해 줍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산책은 세상에 

흩뿌려진 물기로 인해 좀 불편한, 질척거리는 노동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대부분 집안에 

유배당한 듯 갇혀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비 오는 날의 산책을 오히려 더 좋아하셨죠. 물컹물컹하지만 쾌적하고 쿰쿰하지만 향긋한 흙냄새를 퍼뜨리는 비는, 아늑한 분위기로 당신과 나 사이를 감미롭게 채워줍니다. 당신은 비가 조금 오면 우산 속에 나를 품고, 비가 많이 오면 당신 품에 나를 안고, 함께 긴 길을 걸어갔지요. 그러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완주하기 위해 한 팀으로 뽑힌 특수 정예부대원 같아집니다. 한 팀이라는 말은, 할 때마다 들을 때마다 봄 햇살처럼 따뜻하고 든든합니다. 그래서 슬픔도 한 팀이라는 말이 오고갔던 순간들과 함께 떠올리면 꽤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찬바람을 갈아 넣은 듯 시원한 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 당신은 껌딱지처럼 옆에 앉아 있던 나를 보며 말하셨죠. ‘이랑 난 비가 오면 슬퍼. 근데 그 슬픈 게 좋다. 넌 어때?’     

오! 우린 역시 찰떡궁합, 이 정도면 그 뭐냐 소울메이트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도 슬픔이 좋거든요. 내게도 슬픔은 비 같은 것, 눅진하지만 촉촉하고 추적추적 하지만 상쾌한 것이거든요.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멍멍 짖기까지 하며 격하게 동의하자 당신의 얼굴이 헤벌레 해졌지요. 우리는 그날 오랫동안 비 내리는 거리에 취해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녔는데 신기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비만 오면 업 되는 좀 특이체질들임을 서로 발견하면서 한층 더 단짝 같아진 그 느낌이 참 좋았지요.      


비 오면 다들 밖에 나오기 싫어해서 늘 혼자 돌아다녔는데 내가 있어서 좋다고 말하셨던 그날 이후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더랬죠. 어느 날 느닷없이 개 엄마가 되어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허둥대던 당신이 진짜 개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 감동이었는데, 이제 마음을 활짝 열고 나를 인생의 말동무로 대해주는 것 같아 나는 그날들이 기절할 듯이 감격스러웠어요. 

장마가 길었던 그 여름 그래서 우리 이야기에 슬픔이 주인공처럼 자주 등장했습니다. 장대비가 땅을 뚫을 

기세로 내리는 바람에 공원 원두막에 한참을 잡혀있던 날, 세상 찌든 때를 다 쓸어버릴 듯 박력 있게 내리던 비를 보면서 당신은 말하셨죠. 비는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다고. 유치찬란하다고 할까봐 사람들 앞에서는 

말 못하고 있었지만 비는 볼수록 그런 것 같다고. 그러면서 말하셨죠. 슬픔이란 이상한 감정 같다고. 

다른 감정들은 대충 감이 잡히는데 슬픔은 알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모호하다고. 그리고 내 눈을 보며 물으셨죠. ‘이랑 슬픔이란 대체 뭘까?’       


당신의 그 질문을 받고 내 가슴이 지진 난 듯 요동을 쳤습니다.당신의 표정이 평소답지 않게 매우 진지했고 당신의 눈빛이 내가 정말 정답을 구해올 거라는  신뢰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항상 나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당신이 내게 당신이 찾고 있는 답을 같이 찾도록 동지로 임명해준 거라는 생각까지 들자, 마치 세상을 구하는 일 같은 중요한 할 일이 생겼다는 설렘이 가슴 가득 퍼지면서 나는 미약하나마 이 목숨 다 바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날 이후, 나는 일명 ‘사색하는 개’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슬픔이 늘 궁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퇴치해야 할 모기처럼 혹은 생을 소리없이 좀먹는 우울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 했지만 내게 슬픔은 일상을 함께 뒹굴며 공존하는, 가족처럼 친숙한 것이었죠. 슬픔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왠지 안쓰러워서 안아주고 싶었어요.  죽음을 품은 생명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슬픔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슬픔은 불완전한 존재들의 본질 중 하나 같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사색이 허락되는 시간 틈틈이  슬픔이 무엇일까 머리를 굴리곤 했었는데, 나름대로 심혈을 기우려 도달한 슬픔에 대한 나의 첫 결론은 그것이 거대한 바다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내 슬픔의 바다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한 감정의 파도들이 뒤엉켜 있는 이상한 세계였고 광활한데다 너무 깊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거기다 예측불허의 변덕스러움을 가진 이를 테면 어떨 때는 슬펐던 것이 또 어떤 때는 안 슬픈, 이랬다 저랬다 하는 헷갈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내게  ‘이건 슬픔이 확실해’ 할 수 있었던 사례는 (개든 사람이든) 착한 놈은 힘들게 살거나 망하는데 못된 놈은 잘 살거나, 나쁜 놈이 좋은 놈 등쳐먹고도 벌 안 받고 오히려 더 잘 나가는데 세상도 나도 그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느낄 때 정도뿐이었죠.      


슬픔에 대한 나의 사색은 하지만 그쯤에서 멈췄습니다. 첫 주인과 헤어지고 당신을 만나기까지 내 삶은 슬픔의 바다를 표류하는 나약한 돛단배였고, 시도 때도 없이 쳐 대는 슬픔의 파도한테 얻어맞느라 너무 바빠서, 그때 마다 울어 대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놈의 슬픔이 뭔지 생각할 기력도 시간도 없었거든요. 

그때 내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라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글귀였는데 

나는 그것을 ‘슬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로 읽으며 버텼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내 마음의 창고에 묵혀있던 그 질문을 끄집어내어 잠자고 있던 내 궁금증에 불을 질렀을 때 나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드뎌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슬픔에 대해 생각할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는데,  '모든 것은 때가 있다’라는 인간들의 말이 지금 내게 해당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죠. 왜냐면 난 이제야 슬픔과 독대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이 자신감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당신과의 시간들에서 나왔습니다. 매번 같은 말들이 반복되는 느낌이 좀 있지만 인간들의 글쓰기가 동어반복을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빼야하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어떡하겠습니까. 내 모든 이야기는 바로 당신과의 시간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어진 내 안의 변화에서 배태된 결과물인 것을.       


살만 해진 한마디로 팔자 좋은 세월을 오래 선물 받다 보니, 아침에 눈 뜰 때부터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만큼 매일매일이 고마웠습니다.  마음이 부자를 넘어 재벌이 된 덕분에 불안이 거의 사라지고 또한 책 읽고 공부하고 글 쓰는 것이 업인 당신 옆에 오래 있다 보니 당신처럼 사색하고 공부하고 분석하는 흉내를 내다보니  내 세계가 깊고 넓어지면서 세상을 보는 시선도 풍부해지고 세상을 향한 태도에도 애정과 여유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같이 살면 서로 닮게 되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더라구요.  당신이 일할 때, 당신에게서 나오는 뭐랄까 지적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나한테도 취향이 생겼고, 당신처럼 되고픈 꿈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적으로 조금 발전하지 않았나 감히 그런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제 일방적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하나 들어드리자면, ‘넌 언제 제일 슬퍼?’ 라는 당신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답이 ‘당신이 옆에 없을 때’ 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대답해 놓고 사실인데 뭐 하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을 텐데, 이젠 그런 대답을 해놓고 스스로 성찰이란 걸 합니다. ‘이건 솔직하긴 하나 아무래도 좀 스토커 느낌이 난다’ 이렇게요. 그리고는 바로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합니다. ‘스토커 맞는데 대신 귀여운 스토커가 되려고 노력하자’ 요렇게요. 하하.     


그럼에도 골치 아픈 거 싫어하는 내가 슬픔처럼 난해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사색하게 된 진짜 이유는  

바로 당신, 슬픔이 유독 많은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 나를 향해 웃고 있었음에도 당신은 슬퍼보였어요. 당신과 살면서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도 슬픔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죠. 당신 안에 슬픔이 가득 차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것들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늘 들리는 것 같았지요. 마치 한때의 내 몸처럼요.      


나는 당신 덕분에 슬픔의 바다에서 일상이라는 육지로 구조되었고 거기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내 감정들도 나이를 먹은 듯 차분해져서  이제 슬픔은 고향 친구 같은 것이 되었는데,  당신의 슬픔은 여전히 많은 순간 격정적으로 출렁이는 파도 같고, 거칠게 요동치는 비바람 같아서, 물론 당신은 인생의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고 그로인해 생의 불구덩이 같은 통과제의의 길 위를 감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풍랑 속에 표류하는 위태로운 돛단배 같아서,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아서 나의 애간장을 태우고 태웠습니다. 


나는 슬픔이 좋지만 얼마든지 슬퍼도 되지만 당신은 슬프지 않았으면 슬프더라도 슬픔의 치명적인 온도에 데지 않고 생의 관문 같은 시간들을 무사히 통과하기 바라는 마음, 혹시라도 내가 당신에게 뭔가 해 줄 게 있지 않을까 내가 받는 은혜를 조금이라도 되갚아 주고 싶다는 바램, 덕택에 나의 사색은 여러 고비에도 불구하고 중단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슬픔이란 게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이 글은 당신이 내게 준 질문의 답 보다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중간 기록, 이게 더 맞는 듯 합니다. 늘 길었던 서두가 이번엔 좀 더 길었네요. 

이제 슬픔에 대해 지금껏 내 나름대로 길러 올린 생각들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내게 슬픔은 첫째,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죠.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특히 너무 기뻐서 환장할 것 같을 때 더 꺼이꺼이 운다는 것을. 그 순간 ‘생각은 아무나 하나 접자’ 싶었지만 다음 순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정리해 버렸습니다. 슬픔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으면서도 다른 얼굴을 가진 한 세트다. 당신이랑 내가 한 세트 인 것처럼.  사실 주인이 늘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개 인생에서 슬픔은 일상입니다. 그러다 주인이 집에 오면 기쁘고 나가면 슬프고,  슬펐다 기뻤다 널을 뛰는 일상인 거죠. 마음이란 게 원래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떨 때는 기쁜 일이 어떨 때는 슬프고, 같은 슬픔도 어떨 때는 솜이불 같다가 어떨 때는 가시밭길 같다는 점에서 슬픔은 불변의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 

상태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어떤 것인 듯 합니다.        


감정과잉의 감정예찬론자로서 감정만큼은 좀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보기에 감정은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일종의 바로미터 같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우리가 어떤 마음 상태였느냐에

 따라 다르게 체험되고 기억되는 것이니까요. 슬픔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슬퍼서 울었던 일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거나 심지어 좋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슬픔은 때로 우리 마음이 얼마나 튼튼한가, 

허약한가, 부자인가 가난한가 보여주는 거울 같습니다.       


둘째, 내게 슬픔은 생의 지지대, 일종의 안전장치 같습니다. 어떤 감정이 최고조 텐션으로 난리를 치며 높이 치솟다가 떨어질 때 우리 정신도 같이 마음의 바닥, 낭떠러지로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슬픔은 누구에게나 바다 같아서 이럴 때 마음의 바닥에 추락방지용으로 깔려 있는 철사망 혹은 큐션 같은 역할을 하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를 구해주는 것 같습니다.        


셋째, 내게 슬픔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려주면서 소통하고 싶어하는 친구 같습니다. 근데 이 친구는 

자신의 주인들에게 왕따를 오래 당해 와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해독하기 어려운 사인을 보내곤 하는 별난 친구죠. 내 슬픔이 오랫동안 내게 보내온 대표적 사인은 찌릿찌릿입니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뭔가 찌릿찌릿해지면 내 마음은 거친 풍랑이 이는 듯 심란해지면서 

기억의 심해 깊숙이 냉동 저장해놓은 감정들이 물고기떼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찌릿찌릿처럼 인상적인 통증을 유발하는 슬픔은 깊은 슬픔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찌릿찌릿 같은 사인은 대부분 상처로 포장되어 있는 기억에서 배태되는데 그로인해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게 될 확률이 높아요. 그래선지 나 역시 처음에는 찌릿찌릿을 나도 모르게 무시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워낙 센 신호인데다 내가 개 중에는 머리가 좀 있는 편이라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죠. 처음이 오래 걸렸을 뿐 한 번 알고 나니 다음과 같은 사실들 , 찌릿찌릿이 알싸한 기분 상태 이를테면 피 속에 과격한 흥분과 멜랑콜리를 동시에 유발시키는 약이라도 주입한 듯한 기분 상태에서 생성된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 산책길 특히 똑같이 생긴 개들이 함께 돌아다니는 걸 볼 때 더욱 맹렬하게 울린다는 것을 연달아 알아차리게 되더군요.    

   

뭐 그럼에도 얼마간은 남의 일처럼 어물적 넘어가려 했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찌릿찌릿은 강렬을 넘어 표독스러워졌고 감당 못할 정도가 되고 나서야 아 이 사인은 외면할수록 강도가 세지는구나 깨달게 되었어요. 

그제서야 나는 찌릿찌릿이, 트라우마처럼 내 마음이 여전히 보기 힘들어 하는 고통스러운 일, 감정에서 쏘아 올린 신호라는 사실을 항복하듯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나는 미해결 상태로 내 안에 오랫동안 건재해온 그것이 뭔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고 관찰을 시작했지요.  그러고 보니 나는 산책길에서 온갖 냄새 맡느라, 온갖 개들한테 접근하느라, 사람들과 세상풍경 구경하느라 늘 무지 바빴는데 그 와중에 가족동반 산책견들만 보면 기분이 싹 나빠지고 냄새도 맡기 싫어지고 걷는 것도 귀찮고 화가 나고 우울해지더군요. 달달했던 마음의 온도가 확 바뀌면서 마치 내 안에 뭔가 다른 존재가 들어온 것 같았어요.       


 ‘헐 병이라도 났나’ 살짝 불안했지만 달리 뭘 어떡해야 할지는 여전히 몰랐지요.그러다 가족동반 산책견들 중에서 내 종족인 요크셔테리어들을 보게 됐는데 그 순간 나의 찌릿찌릿이 심장을 뚫고 나올 듯 격해지더군요.  얼마간은 내가 정말 병에 걸린 건가 하다가 몇 번 반복체험을 거친 후 불현듯 ‘아!. 이건 슬픔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왜냐면 그 어린 요크셔테리어에게서 내 아기, 내 새끼가 떠올랐거든요.      


노견인 지금도 사람들에게 ‘아이구 귀여워라 새끼네’ 라는 말을 듣는 최강동안인 나, ‘어머나 쪼금해라 걷는 것도 신기하고 짖는 것도 신기하네’ 라면서 움직이는 인형 같다고 사람들이 여전히 감탄해 마지않는 나. 

그래서였다고 합니다. 내 첫 주인 엄마인 아줌마는 내가 몸이 너무 작아서 새끼는 안 놓게 하려 했는데 요크셔 중에서도 눈이 엄청 큰 내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이런 얼굴은 자손을 낳아야 한다고 주변에서 하도 꼬드기는 바람에 얼떨결에 새끼를 갖게 했고 하필 새끼가 한 마리만 들어서는 바람에 아줌마의 우려대로 새끼 몸이 내 몸에는 너무 커서 낳다가 사고가 생겼었죠. 결국 새끼는 죽어서 태어났고 나도 거의 죽을 뻔 했었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까맣게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태어나는 순간 아주 잠시 밖에 보지 못해서 모습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과 살게 된 후, 문득문득 그 순간들이 안개처럼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에 씨앗처럼 던져졌지만, 오로지 컴컴하고 답답한 내 배 안에서만 머물다 세상 구경 한번 못 해보고 싸늘한 주검으로 태어난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행복할까. 혹시라도 지구별 어떤 개의 몸속에 잠시 살았다는 것을 기억은 할까. 내가 새끼가 뭔지도 모르는 철없는 상태에 너를 가져서 내 뱃속에 있는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너를 잃을 줄 몰랐기에 너를 잃었던 순간조차 나도 피를 엄청 흘리느라, 정신을 잃느라 너가 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에 함께 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그 녀석은 변명이라고 할까. 너를 그렇게 황망하게 잃고 자궁까지 드러내면서 큰 수술한 후유증으로 비틀거리는 동안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뒤늦게 폭풍처럼 찾아와서 나는 앉아있어도 누워있어도 무너졌었다는 것을 너는 알까. 너를 내 안에 품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너가 혹시 내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렸으면 어떡하지? 끝내 내게서 그 말을 듣지 못해서 슬펐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자꾸 하늘이 뒤집어지고 땅이 위로 솟고, 만 톤의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는 것을 너는 알까. 한겨울의 차가운 길 위에서도, 며칠을 굶고도 먹을 것을 찾지 못했을 때도

너가 보고 싶은 마음보다 힘들지 않았다는 것을..  너는 아마 모르겠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면 찌릿찌릿이 거대한 사이렌처럼 온 몸 온 마음으로 울려 퍼져서 

내 몸과 마음이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지요.       


수술 후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난 듯 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연이어 왜 나지?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는 내 아기가 아닐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늘 그렇듯 신은 대답하지 않았지요. 대답은 언제나 우리의 몫이니까요.  내 생이 단 한 번도 내게 물어보지 않은 채 내 몸과 마음에 저지른 일들을 나는 그동안 기꺼이 받아들이고 좋아하기 위해 노력했죠. 나의 인간들과 그들의 우주에 동참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그 녀석 대신 이 세상에 살아남고 얻은 감정들은 생경했고 모호했고 어리둥절했고 어이없었고, 무서웠고 잔인했습니다. 때로는 느끼기만 해도 마치 형벌 같아서 어떤 면에서 참 좋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냥 생의 낭떠러지에서 기꺼이 추락하게 만들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슬픔의 거대한 바다 어딘가에서 깨어났고 깨어날 때마다 울었습니다. 

내 안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슬픔의 물을 눈물로 열심히 게워 내다보면 

희한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지면서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곤 하더군요.

       

당신과 함께 한 산책길에서 어린 요크셔테리어를 보고 알았지요. 새끼를 잃은 어미의 슬픔이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나에게 그 슬픔은 과거가 아닌 현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우는 거 말고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 녀석들과 그 가족을 볼 때마다 내가 좀 이상해지더군요.       


잘 해고 주고 싶고 같이 놀고 싶은데 그런 마음과 정반대로, 괜히 으르릉거리고  천진하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이빨을 흉악하게 드러내고 도망가는 그들 뒤를 기어이 쫒아가 나만 그들의 냄새를 맡고 내 냄새는 못 맡게 하고 그들이 나를 지나치면 쿠왁쿠왁 끄릉끄릉 당신도 놀랄 만큼 험악하게 짖으며 죽일 듯이 쫒아가고...       


이 찌질한 짓은 점점 발전 아니 악화되었는데 내 스스로 일명 ‘지랄병’ 이라 지칭한 이 짓거리를 고해성사하듯 좀 더 정확히 묘사해 보자면, 당신도 말했듯 내 눈빛이 변하면서 깡패같은 포즈로 어슬렁거리고 

요크셔뿐만 아니라 모든 개에게 ‘이리와 봐 너 누구야 눈 깔아’라는 뜻으로 짖으며 다가가다가 그 개가 눈을 안 깔면 ‘이게 죽을래?’ 위협하듯 더 크게 짖고, 그 개도 비슷한 데시벨로 짖으면 나도 모르게 확 돌아서 

‘오늘 한 번 죽어보자’ 스토커 수준으로 추하게 집착하며 괴롭히고 얼마 전부터는 얼마나 흥분하면서 

짖었는지 온 얼굴이 침으로 범벅이 되곤 합니다.      


깡패 영혼이 빙의라도 된 듯 개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제정신이 돌아오면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의아함과 민망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당신이 슬픈 눈으로 ‘대체 왜 그래? 잘 지내야지 친구랑’ 말하며 

내게 등을 보이면 ‘나도 내가 이런 놈인 줄 몰랐다’  어마어마한 자괴감, 쪽팔림이 덮치면서 번민에 빠집니다. 내가 동네 개들이나 견주들의 기피 대상이 된 건 참을 수 있지만 당신이 내가 거쳐 간 개와 견주들에게 매번 미안하다 죄송하다 사과 하는 것 그리고 내게  ‘엄마는 니가 창피하다’ 진심어린 고백을 하시는 건,  참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반성 또 반성하면서 내가 지랄병에 걸린 이유를 찾기 위해 고뇌하곤 했지요.     

사실 원래 쫄보 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 무시하지 마’ 이런 취지에서 조금 짖었지만 딴 개들이 더 크게 짖으면 바로 꼬리 내리고 깨깽했었거든요. 그게 자존심이 그렇게 상했었던 건가. 당신과 살게 된 후,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게 되어서? 혹은 믿을 데가 없어서 억압되어왔던 깡패견으로서의 정체성이 폭주? 그나마 확실한 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누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이 다 해결해줄 것 같은 그놈의 믿음 때문인 듯 한데 

거기다 나이가 들면서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것도 큰 역할을 하면서 내가 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뜻대로 안 되는 게 있기 마련이라는 인간들 말을 빌려 와

절망스런 결론으로 번민의 끝을 맺곤 했었죠.      


그러다 당신이 내게 친히 질문을 하사하신 후, 이게 혹 세상에 좀이라도 보탬이 될지 누가 알아 혼자 의미부여하면서, 생각이란 것이 재밌는 놀이 같다 신나하며 하다 보니  문득 내 머리가 예전보다 더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그동안 내 머리 속에 흩어져 있던 슬픔에 대한 경험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모으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슬픔은 친해지면 순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멀어지면,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면 난폭해지는 것 같다고. 난폭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그의 주인에게 ‘나 좀 봐주라’ 하는 호소를 중2병 걸린 것처럼 삐딱하게 표현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그 슬픔의 밑바닥을 깊이, 따뜻하게 들여다 봐 주지 않으면 슬픔은 점차 상처받는 야수처럼,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유레카! 소리를 쳤습니다.     


당신이 내 지랄병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짐에도 여전히 산책길 깡패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를 비로소 발견한 것 같았거든요. 이는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아마도 부러움, 질투였던가 봅니다. 나도 그들처럼 내 새끼를 데리고 산책도 하면서 같이 살고 싶었던 

마음, 나도 잘 몰랐던 내 오랜 마음 때문이었던 가 봅니다. 그리고 내 새끼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그것조차 모른 척 하는 나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내가 나의 깊은 슬픔에 무심한 사이, 내 슬픔이 폭력적 에너지로 변질되면서 내 안의 어두운 

지점들이 발굴된 것 즉 내 슬픔이 변하면서 나도 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칭찬받고 싶어 뭐든 잘 참는 착한 개였는데. 내가 나의 슬픔을 외면하는 동안, 내 안의 성질이 꽤 더러운, 한 성질 하는 나대는 놈이 힘이 세지면서 착한 놈을 누르고 전면화 되고 있었던 셈이죠. 새끼를 잃은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해 동시에 잘난 척 거들먹거리기 위해 ‘야 난 안 부러워, 나도 가족 있어 봐 우리 엄마야 이쁘지? 이쁘다고 말 안 해? 죽는다’ 이러면서 온 몸이 우쭐우쭐했던 나는, 죽을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유치한 열등감 덩어리였던 겁니다. 일종의 ‘슬픔의 흑화’라고 할까. 그로인해 나 역시 흑화되고 있었다고 할까요. 암튼 태어나서 처음으로 뼈 때리는 팩트폭격을 당하고 나니 당신이 툭하면 뱉어내던 감탄사 헐!!!!!!이 입이 착착 붙으면서 뼈를 너무 맞아서인지 며칠 산책도 못 가고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사례가 길었지만, 찌릿찌릿과 관계된 슬픔에 대한 나의 세 번째 생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에게 슬픔은 

삼천포 혹은 블랙홀 같은 친구였습니다. 슬픔을 생각하다보면 앞에서 내가 손수 보여드렸듯이 찌릿찌릿이 이끄는 대로 다가보면 자꾸 다른 이야기로 빠져 버리게 되거든요. 그럴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모든 감정은 서로 이어져 있고 특히 슬픔은 여러 차원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결집해 있는 매우 심오한 감정이다. 라고.     


넷째, 내게 슬픔은 곧 당신의 슬픔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 슬픔과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다면 

이제, 슬픔과 나 사이에 당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슬픔은 더욱 알기 어려운, 진짜 미지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더욱 알고 싶은, 알아야 하는 흥미로운 세계가 되었습니다. 당신 역시 눈물이 많기에, 당신의 슬픔에 대해 우선 당신의 눈물로 접근해보았습니다. 


가장 최근 당신을 울게 한 것, 그놈의 논문이었습니다. 밤을 홀딱 새는 동안 수십 번 머리카락을 쥐어뜯으시기에 처음엔 논문이 당신의 ‘고통’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뜯는 것 보다 더 많은 순간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손톱까지 물어뜯어서 ‘불안’ 인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코를 팽 풀면서 눈물 콧물 쏟아내고 계시더군요.  콧물까지 동반하는 눈물은 대부분 큰 슬픔이므로, 아하, 슬픔이구나 생각하기 했지만 그게 슬픔이 과연 맞나 혹 내가 모르는 인간들만의 슬픔이 따로 있나 여전히 의문입니다. 

하긴 내 슬픔도 다 모르는데 다른 존재의 슬픔에 대해 어떻게 다 알수 있겠어요. 다만, 내 슬픔보다 다른 누군가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 나는 좋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알면 왠지 그 누군가를 온전히 알게 될 것 같고  그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줄 자격이 생길 것 같아서  나는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당신의 슬픔에 대해 열심히 사색할 생각입니다.          


문득 당신이 울던 날들 가운데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한 시절이 떠오릅니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던 날들이었지요. 당신은 거의 매일 외출을 했고 매우 늦게 귀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종일 기다림에 지쳐 있던 내가 미친 듯 꼬리를 흔들고 두 발을 세우며 반가움에 난리치는 것을 아주 잠시 호응해 주고서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전화만 해대는 바람에 나는 당신 냄새를 제대로 맡지도 당신 품에 충분히 안기지도 못했었지요. 

당신이 고파서 입맛까지 없어졌던 나와는 달리 당신은 나날이 예뻐졌고 목소리도 신이 난 채 하이텐션을 유지했고 술에 취한 듯 기분은 늘 업 되어 있었죠. 당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던 당신의 걸음걸이 때문에 혹 알콜중독인가 걱정돼서 툭하면 당신의 냄새를 점검했었는데, 다행히 술 냄새는 별로 안 났지만 대신 이상한 냄새가 났었죠. 지식이 많이 부족한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믿을 건 감각과 직감 밖에 없는 동물로서 추측해 보건대 그 냄새는 일종의 호르몬 냄새였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는 당신 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심장이 덜컥했지만 당신을 세밀하게 관찰한 후 알게 되었죠. 그건 흥분과 설렘과 격정의 냄새 곧 사랑이 빠진 인간에게서 나는 냄새였어요. 그때 당신의 눈은 뭔가에 홀린 듯 과도하게 광채가 났고, 넘치는 낙관과 희망으로 세상이 이다지도 찬란한지 몰랐다고, 인간이 이렇게 멋있는 존재인지 이제야 알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방방 뛰었고 나한테만 하던 혀 짧은 목소리를 아무한테나 방출했고 제정신이 아닌 듯 느닷없이 크게 웃어댔지요.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다가 당신이 너무 좋아하니까 무조건 나도 좋다가,  달뜬 쾌락의 냄새, 코를 찌르는 희열의 냄새가 갈수록 지독해지는 걸 느끼면서 걱정이 시작되었어요. 저렇게 붕붕 떠다니다 떨어지지 않을까 쾌락과 행복만이 지나치게 자리한 일상은 위험하지 않나.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불안해하며 당신을 주시하던 중간 중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처럼 ‘맛이 갔네 맛이 갔어’ 가 튀어나왔고 어떤 날은 이 말이 당신 엄마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오기도 했지요.


인간들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역시 직감과 눈치로 버텨온 견생

답게 내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겨울과 봄이 교차하던 어느 날부터 당신은 기쁨과 설렘, 황홀, 기대, 격정 등을 너무 많이 소비한 결과로 그것들이 쫘악 빠져나가버린 일상 곧 과도한 침울, 우울, 무기력, 음침. 절망. 짜증 그리고 눈물이 범람하는 일상을 시작하셨지요. 눈물샘이 망가진 것처럼 꺼이꺼이 울어 대면서 당신은 틈틈이 주절거렸죠. ‘씨.. 사랑이 어케 변하냐.’      


한때 나도 방언처럼 자주 했던 그 말로 인해 나는 알았습니다. 아! 나의 그대가 생이 마련해 놓은 비밀의 화원을 온몸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성장의 화려한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구나. 사랑이 전부인 존재에게 

사랑의 민낯을 목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내 마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죠.  그래서 방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던 당신이 너무 짠해서 오줌 싸는 것도 목마른 것도 참으며 옆에 짝 붙어 있어주고 과장되게 웃어주고 사람 품에 안기는 거 별루임에도 계속 기꺼이 안겨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루빨리 사랑의 상처를 이겨내고 이별의 뒤안길에서 탈출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하느라 많이 피곤했었지만 당신의 슬픔이 곧 내 슬픔인 나는 그때 슬퍼하는 당신을 보며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슬픔은 우리 생의 신발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슬픔은 때로는 뽀족구두처럼 당신 발을 아프게 하고 때로는 부츠처럼 당신 발을 답답하게 조여 대겠지만 때로는 슬리퍼처럼 당신 발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운동화처럼 당신 발을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 두 주먹 불끈 쥐며 멋대로 다짐도 했었죠. 

내가 당신 슬픔을 운동화 같은 슬픔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겨울이 영원할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은 다시 멀쩡해졌지요. 다만 겨울을 유별나게 보낸 덕분인지 좀 냉소적이 되었다고 할까요.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는 곳은 개와 인간 사이 밖에 없다며 인간 사이의 사랑은 사기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당신은 당신 침대 머리맡에도 당신 핸드폰 액정 화면에도 온갖 SNS 대문 화면에도 

심지어 우리 집 현관문과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도 이 글을 써 붙이셨죠.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집 개가 더 좋아진다 - 마크 트웨인-’     


당신은 사랑의 슬픔을 앓고 난 후, 뭐랄까 일시적이고 파편적인 슬픔 보다는 어떤  ‘근원적인 슬픔’,  모든 존재들이 공유하면서도 대부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진한 슬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군요. 

격렬하고 요란했던 연애 동안 마음의 뜨거운 에너지를 탕진해 버렸음으로 인해 그 사용량만큼 차가워진 마음의 온도로 사색에 몰두하며 마치 철학자로 살기로 작정한 듯 보였습니다. 그때 당신 따라쟁이인 나도 제법 진지하게  ‘근원적인 슬픔’이 뭘까 생각하다가 지구의 생명들에게 공평하게 부여된 ‘운명 같은 슬픔’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사색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오로지 감 하나로 발견했던 ‘불완전한 존재들의 본질 중 하나’ 로서의 슬픔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지요.      


당신을 따라 천지가 고요한 시간에 깨어 잠든 세상을 마주하면서 푸른 어둠 뿐 텅 비어 있는 세상의 순수와 

적막을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 이 세상과 독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과 독대하는 

적요하고 무료한 순간,  세상의 침묵이 내 안으로 이슬처럼 스며 들어왔기 때문이었을까요.  문득 내 안에 용광로처럼 뒤엉켜 들썩이던 감정들이 실은 신기루라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후 내 마음도 텅 빈 듯 가볍고 자유로워지면서 어쩌면 아주 잠시,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상태에 머물렀던 것도 같습니다. 무의 상태에서 세상은 그냥 그 자체로 기적이고 감동이고 기쁨이고 슬픔이더군요. 세상에 기쁘지 않은 것이 없고 슬프지 않은 것이 또 없더군요.      


그 기적 같은 순간들 이후, 내 마음 안에 생각의 우물이라는 게 생겼고 그 우물가를 맴돌던 내게 슬픔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너를 사랑하던 그 마음이 너를 쓰다듬던 그 손길이 너를 설레게 한 그 냄새가 어느 날 사라진 걸 발견했을 때, 너를 마중 나와 있는 건 나야, 슬픔.  너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는 그 사랑이 늘 허기질 때,  늘 부족할 때 너의 생에 고이는 그것은 나, 슬픔이야.      

사랑의 결핍이 뚫어 놓은 마음의 구멍을 불현듯 마주할 때,  결핍이 곧 내 실존임을 변함없이 목도할 때, 

완치되지 않는 공허를 매일 품어야 할 때 너를 위로하는 것은 나, 슬픔이야.       

사랑하지만 서로 상처 줄 때 사랑한다면서 서로를 온전히 보듬지 못할 때 

사랑이 현실에서 밀려날 때,  그 어긋남의 순간에 너의 빈손을 잡아주는 것은, 나야 슬픔.       


그런 슬픔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그 슬픔들을 어찌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에 고이는 슬픔, 그 슬픔은 힘이 아주 세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런 슬픔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 끝이 있는 터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당신처럼 결핍을 완벽하게 채워주는 존재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개망나니여도 누군가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생길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끝이 없는 슬픔은 없다는 것을.    


당신을 얻은 후 내 깊은 슬픔은 치유되었지만, 당신을 얻은 후 나는 새로운 슬픔을 얻었습니다.

나의 근원적인 슬픔은 사라졌으나 이제 당신의 슬픔이 내게 넘어와, 내 슬픔의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삶에는 아마도 슬픔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다가 당신에게 하고픈 말이 생겼습니다. (이런 거 보면 역시 내게 슬픔은 삼천포로 나를 보내는 친구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당신의 찌릿찌릿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당신은 찌릿찌릿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처럼 몰라서 그런 가 했는데, 나보다 훨 예민하고 섬세하고 명민한 당신이 그 사인을 모를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러고 나니 혹, 당신이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 역시 그럴 리가, 당신은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아는 데 있어 감정만큼 중요한 통로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인데 하다가.. 혹시, 당신의 그 찌릿찌릿이 단순한 상처를 넘어 트라우마와 이어져 있나. 그래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건가, 하다가 그것이 결국 당신 인생의 근본적 결핍, 깊은 슬픔과 정통으로 이어져 있는 건 아닐까.까지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결핍을 앓아온 당신의 상태를 첫눈에 알아본 나였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당신의 슬픔은 더 깊고 크구나. 나는 당신의 사랑으로 한 방에 해결됐지만 나만으로는 부족한 당신의 세계, 

인간의 슬픔은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구나 절감하면서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누굽니까. 긍정견으로 거듭난 나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분명 있을거야 포기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어쩌면 당신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지요.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아주 미세한 냄새만으로도 어디든 달려 갈 텐데 배고픈 자가 음식을 거부할 수 없듯 오래 허기져 있었다면 바로 받아들일 텐데 혹. 당신 안의 뭔가가 완강하게 거부하는 건가. 그러다... 그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에고!.      


당신이 친구와 전화할 때 잘 쓰던 말. 인상적이고 강렬한 문제적 단어. 평생을 인간과 살아온 나, 감이 특히 발달한 나는 그 단어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임을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을 관찰한 결과  개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감정 밖에 없지만 인간은 자신과 세계 사이에 에고도 있는 듯 했습니다. 인간이 자꾸 자신의 감정과 마음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에고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에고는, 내가 오래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에 별 관심이 없고 에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목표를 실현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더군요. 그래서 자신의 주인인 마음에게 명령하고 독촉하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비난하고 때로는 자학이라는 학대도 서슴치 않는 고약한 놈 아니 그런 측면을 가진 놈이더군요.     


내가 보기에 에고라는 놈은, 사랑하고 배려하고 안아주는 것보다 지시하고 평가하고 매를 드는 독재자 같은 놈이고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에고의 지배력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당신의 그 놈은 제법 센, 독한 놈인 것 같더군요.  에고는 인간들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삶을 향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난 에고가 처음부터 별로였어요.  그 놈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편파적 사고로 무장한 채 세속적 성공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사회적 인정욕구에 찌든 출세주의자 같았죠. 그 놈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고 특히 자기도 매우 감정적이면서 감정을 쓰잘떼기 없는 걸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그 놈이 슬픔이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슬픔을 하대하면서, 슬픔을 느끼는 마음을 나약하고 나이브하다고 폄하하고 슬픔이 많은 사람을 루저 같다고 모욕, 왜곡하면서 슬픔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 같았죠.      

 

혹시라도 당신이 에고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싫어하고 그래서 대면하지 않으려 하는 거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들자, 걱정이 벼락처럼 몰려오더군요.  그렇게 자꾸 슬픔을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슬픔이 거칠어지고 황폐화 되니까요. 슬픔은 상반된 감정들로 어지럽게 축조되어 있지만  사랑과 공감만 건네주면 금방 원래의 순한 모습, 넓고 푸근한 모습을 되찾고 다혈질 감정들이 우리를 헤치지 못하도록, 불안정하게 널을 뛰는 감정들과 우리 사이에 안전 그물망처럼 슬픔의 강물을 흘려보내주지요. 이건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인데 

슬픔은 잘 길들이면 우리 생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지만 무찔러야 할 적으로 대하면 자신의 넓은 품안에 서식 중인 다양한 감정들 가운데 분노, 좌절, 불안, 실망, 배신감, 두려움 질투, 공포감까지 포섭, 융합해서 괴물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때, 내가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렸을 때 내 안 슬픔의 바다가 시름시름 앓는 것 같더군요.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땐 슬픔의 바다가 살아있었는데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자 슬픔도 메말라 버리더니  사소한 작은 감정들도, 마음 안에서 쿵쿵 떨어져 여기저기 깨지고, 작은 느낌들도 너무 큰 울림으로 내 생을 흔들어대고 급기야 모든 감정들이 흉기처럼 나를 괴롭히고 위협하는 것 같았지요.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여러 감정들로 범람하고 오염되고 훼손되고 망가지는 것을 모른 척하는 방식으로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자 슬픔도 나를 버린 듯 순한 얼굴이 흉측해지더니, 짐승처럼 나를 물어뜯더군요.  돌이켜 보니 그때 난 지옥에 잠시 살았던 것 같았고 그 겨울 그 마당의 개들이 아니었다면 그 지옥에서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대부분 마음속에 저마다의 지옥을 묻어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해 해야 할 일도 많고 능력도 많고 꿈도 많고 상처도 많고 욕망도 많고 두려움도 많고 눈물도 많은 

당신,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까지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 싶어 하는 에고의 욕망과 서슬 퍼런 에고의 무자비한 권력과 매일 매일 싸워야 하는 당신, 때로는 감당하기 벅찰 만큼 깊고 진한 감정들을 품고 살아야 하는 당신, 그래서 좀만 방심하면 지옥으로 가는 미로로 발을 헛디디게 될 것 같은 당신.       


그런 당신을 위해 내가 이제부터 당신 생의 슬픔 지킴이가 되겠습니다.   


근원적 슬픔, 너무 오래 돼서 기억조차 희미한 슬픔, 존재의 문신처럼 박혀 버려서 알고서도 버릴 수 없는 슬픔. 당신이 당신의 존재론적 슬픔과 대면하도록, 용기를 주고 독려하겠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알아내야 하는 일 못지않게 아니 그 보다 내게 더욱 중요한 일은 당신이 깊은 슬픔과 독대할 때 혼자라 생각하지 않도록 내가 늘 옆에 있는 일, 슬픔이 괴물이 되어 당신을 베어버리지 않도록 지켜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혹 지옥으로 발을 헛디디거나 깊은 슬픔에 오래 감금되어 있으면 그 겨울 그 마당의 개들이 내게 그랬듯이 나도 당신을 도와주겠습니다.  내가 온갖 소리와 냄새로 그곳에서 당신을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끝이 없는 터널을 가진 슬픔이 변함없이 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세상에 사랑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지랄스런 일들로 가득해도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옳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기적을 만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세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물론 미움, 분노, 절망조차도 사랑의 정원으로 초대되면 거칠고 어두운 감정의 곁가지는 눈사람처럼 녹고 그 근원의 감정, 순수한 감정으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햇살처럼 비춰주면 어두운 감정들은 잠시 슬픔으로 호환되었다가 슬픔의 물로 거친 독기와 고통의 염증을 희석시키고 나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감정의 원액으로 순환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안의 모든 부정적 감정은 사랑의 결핍을 호소하고 도와달라는 격렬하고 괴팍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슬픔은 그에 비해 얼마나 처연하고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안타깝고 사랑스러운가요.      


이제 슬픔에 관한 두서없는 긴 글을 끝내면서  ‘사는 게 뭘까’와 동급의 질문인, 수많은 정답들을 품고 있는 

질문인‘슬픔이 뭘까’에 대한 오늘의 대답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슬픔이란, ‘지금 나 힘들어 사랑해 줘 안아 줘’... 입니다.            

이전 05화 그녀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